교우애(交友愛), 부부애(夫婦愛) 그리고 전우애(戰友愛)
그날 아침 나는, 깔끔하게 보이고 싶은 생각에 미리 골라 놓은 하늘색 넥타이를 Windsor Knot 형태로 착용했다. 지난번에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여전히 나를 오빠, 오빠 부르던 늦깎이 교대(敎大) 3학년 아가씨를 퇴근 후 개인적으로 만나기 위해. 얼마 전 회사에서, 끝날 것 같지 않던 기나긴 프로젝트를 겨우 마친 기념으로 간단한 음주를 곁들인 회식을 하고 난 뒤 집에 들어가는 길에, 나는 문득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그냥 한번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주 화요일, 나는 약 열흘 간의 미국 출장 후 겨우 귀국을 했는데, 그때 그 미국 출장은 겨우 귀국을 했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정말이지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 같은 출장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나는 운명(運命)처럼 핸드폰에 저장된 그녀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고, 우린 오랜만에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우리의 끈질긴 인연(因緣)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해 4월, 약 열흘간의 미국 출장.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았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그 출장의 서막(序幕)은, 그해 3월에 발생했던 애틀랜타(Atlanta) 총격사건이었다. 그 사건 이후 미국 출장은 한동안 모두가 기피(忌避)했다. 하지만 TOEIC 시험 성적순(順)으로 출장자를 선발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지침이 나와 당시 가장 막내였던 내가 대상 인원으로 선발됐다. 내가 속했던 조직 내에선 그나마 내가 가장 최근에 영어 시험을 봤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나는 출국 전에 동네 짐나지움(Gymnasium) 사물함을 정리하며, 열흘 이상이나 운동을 못할 거란 생각에 진한 아쉬움을 느꼈는데, 그런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냐면 미국 현지에서 큰 사건이 무려 세 번이나 터졌으니까. 먼저, 첫 번째 사건은 미국행(行) 항공기의 착륙 문제. 그때 미국 출장의 목적지였던 시카고(Chicago)행은 항공권이 없어 뉴욕(New York) 경유를 하게 됐는데, 내가 탑승했던 델타항공은 뉴욕 JFK 공항에 착륙을 하지 못하고 공항 근처 상공에서 거의 한 시간 이상을 계속 맴돌았다. 그때가 2007년 4월이었으니 9.11 테러가 발생한 지 불과 5년 반 밖에 되지 않았던 터. 그런데 기내방송에서는 그냥, 현지 공항 근처의 기류 영향이라는 말만 간헐적으로 반복했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기장이나 부기장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왠지 모를 의심도 강하게 들었다. 그러자 나를 비롯한 탑승객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모두가 매우 불안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항공기는 엄청나게 흔들렸고, 몇몇 탑승객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과호흡증후군 증상을 비롯해 심하게는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때 불현듯 생각났던 영화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 2003)'. 그 영화의 도입부에 나왔던, 아마도 휴 그랜트(Hugh Grant)가 내레이션(Narration)으로 읊조리던 대사에서, 9.11 테러 당시 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졌을 때 그곳에서 휴대폰으로 사람들이 남긴 마지막 말은 증오나 복수가 아닌 사랑의 메시지였다고 했지. 나 역시도 내가 탑승했던 그 항공기가 뉴욕 JKF 공항을 기약 없이 맴돌 때 그녀를 향한 사랑의 메시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두 번째는 급하게 탑승해야 했던 Greyhound 버스 안에서의 사건이었는데, 사실 비즈니스 출장자는 나름 격식(格式)을 지키기 때문에 Greyhound 같은 버스는 잘 타지 않는다. 이건 보통의 미국인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때 무슨 이유였는지 그날 뉴욕에서는 시카고, 디트로이트(Detroit) 등 미국 중부권 대도시로의 항공편이 모두 결항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정해진 일정 탓에 어쩔 수 없이 그 문제의 버스를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올라탔던 버스. 하지만 그 안에는 대부분 미국의 하층민(下層民)으로 보이는 사람들만이 있었고 그중에는 총기를 소지한, 범죄자도 있었다는 것을 나는 탑승 후 약 6시간 정도 후에 알 수 있었다. 왜냐면 내가 앉아 있던 좌석 바로 옆에서 잠결에 엄청난 것을 목격했기 때문인데 그건 다름 아닌, 체격이 거대했던 남자 두 명의 난투극(亂鬪劇)이었다. 비행시간이 길어진 데다 낮과 밤이 바뀌는 최악의 시차까지 겹쳐 엉망이 된 몸상태로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무렵, 아마도 뉴욕을 떠나 필라델피아(Philadelphia)를 거쳐 피츠버그(Pittsburgh)로 향하던 새벽시간이었을 거다. 경찰차 2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속력으로 쫓아와서 내가 탑승했던 버스를 가로막았고, 그 버스 안에서 경찰과 범인의 격투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경찰이 공포탄을 쏜 뒤 바로 그를 제압해서 총기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그때 내가 느꼈던 충격과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게 미국은 무섭다는 걸 몸소 체험했던 계기여서 여길 떠나면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연인(戀人)이 될 사람에게 특히 더 잘하자는 그런 의지를 굳게 다지게 됐다.
게다가 며칠 후 아침, 호텔 방으로 배달된 현지 신문에는 버지니아텍 한인 총격사건 기사가 1면에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그런 탓에 현지에서는 아시아계, 특히 한인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해 현지에서 출장자 신분으로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상당히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론 내가 스스로 더 조심해야겠다고 느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숙박했던 호텔에서 아침식사조차 맘 놓고 할 수 없던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자 나는 출장 내내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계속했었고, 한국에 가면 소중한 사람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듬뿍 담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더 알아가고 싶고 또 가까워지고 싶었던 그녀에게 최대한 빨리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했던 터였다.
그래서 출장 복귀 후 저녁 회식이 끝난 그날 밤, 그녀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한 것이 어쩌면 끈질긴 인연(因緣)이 되어 우리는 몇 년 만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입사를 한 이듬해 그녀는 적성에 맞지 않았던, 나와 같이 다니던 학교의 학과(學科)를 때려치우고 다른 대학의 다른 학과에 다시 입학을 했기에, 우리는 한동안 만나지 못하였다. 아니, 사실 만나기가 힘들었다. 같은 학교라는 끈이 절반 정도는 떨어져 나가서였는지, 아무래도 예전처럼 거리낌 없이 연락하는 건 사실 쉽지 않았던 터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내가 같이 어울렸던 학교 동기들 중 한 명과 2년인가를 사귀었는데, 그 동기가 취업을 하고 신입사원 연수를 갔을 때 거기에서 만난 여자 동기와 바람이 나서 결국 그녀와 헤어졌기에, 그녀를 내가 따로 만나는 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들은 이미 헤어졌는데. 게다가 그들의 관계가 어긋나게 된 건 내 탓이 전혀 아니었는데.
그러니, 나는 얼마나 설렜겠는가. 오랜만의 갑작스러운, 혹은 나의 일방적인 연락에도, 그리고 조만간 한번 같이 만나자는 나의 제안에도 그녀가 흔쾌히 알겠다고 답을 했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때마침 미국 출장을 갔을 때 시카고에 소재(所在)한 현지 업체와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에 대해서 배우고 온 터라 나는 그 시절에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던 안국동 '로마네 꽁띠(Romanée-Conti)'에 그녀를 꼭 데려가고 싶었다. 그래서 퇴근 직전 그녀에게 지금 당장 만나자고, 내가 그쪽으로 당장, 아니 곧 간다고, 또다시 그렇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했다. '조만간'이나 '나중에' 같은 희박한 확률의 단어보다는 '지금'이나 '당장' 같은 확신에 찬 단어가 좋지 않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선택만을 강요한 채. 그리고 한편으론, 기분 좋은 떨림과 오랜만에 느끼는 긴장감과 함께.
그때 사실 나는 내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는 내내 고민을 했다. 또 행여 흐트러졌을까 싶어 지하철 문을 거울삼아 내 외모를 몇 번이나 점검했다. 당시엔 정장을 입고 출근을 했기에, 넥타이와 셔츠, 벨트와 구두 그리고 시계와 가방 등 뭐 어디 하나 이상한 데가 있는지 쓱 쳐다봤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면 이걸 꼭 물어보리라 생각했다. 졸업한 나를 학교 근처가 아닌, 이런 엉뚱한 곳에서, 따로 봐도 어색하지 않냐고. 내가 학교 선배였던 시절 단체모임이나 행사에서 혹은 여럿이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보는 게 아닌, 이렇게 개인적인 자리에서 봐도 괜찮겠냐고. 그렇게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물었는데, "오빠는 예전과 똑같아요."라고 말하는 그녀 앞에서, 사실은 슬롯생활 시작하고나서부터 난 너무 겉늙어버렸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꾹 눌러 겨우 말을 참았다. 내겐 여전히 한참이나 어리게 느껴졌던 스물 일곱 아가씨를 앞에 두고 분명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는데도, 그런데 또 근거 없는 자신감을 앞세워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덧 나도 모르게, 인생선배 같은, 아니 꼰대 같은 얘기만 내 입에서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래도 나는 무척이나 좋았다. 내 앞엔 한때 나의 대학 후배였던 그 귀여운 아가씨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고, 더구나 그 테이블엔 우리 둘만 같이 앉아서 이런저런 정겨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 와인을 앞에 두고, 대화 도중에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면서. 사실 나는 그냥 평범한 온라인 게임인이 된 대학선배였는데 그녀 앞에서 나는, 마치 출세(出世)라도 한 것 같은 그런 엄청난 착각을 하며 기분 좋게 와인을 즐겼다. 그러던 중 문득 그때 나는, 내 앞에 마주 앉은 그녀의 입에서 언젠간 선배라는 호칭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왜! 그녀와 나는 끈질긴 인연(因緣)이기에, 그래서 곧 같이 살게 될 거라고 99% 이상 확신했었으니까! (아, 그때 나는 참 무식하고 저돌적이었다...)
때는 2007년 4월 말의 봄날 밤. 장소는 안국동 "로마네 꽁띠". 배경음악은 노라 존스의 "Come away with me". 상현달이 보름달로 바뀌려고 점점 차오르던 늦은 밤, 약간은 쌀쌀했던 야외 테이블. 그러나 서로의 대화 속에선 온기(溫氣)가 느껴지던, 그곳에서의 정겨운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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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이 된 지금, 그로부터 1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그녀는 나를 아직 '오빠'라고 부른다. 물론, 그 단어를 발음할 때의 억양은 19년 전에 비하면 다소 달라졌지만...
- 그땐 오↗ 빠↗ (선배로서 존경하는 투?????)
- 지금은, 오! 빠!!! (뭐 시킬 때, 빨리 하라는 투!!!!!)
그래도 지금까지 그렇게 사랑스럽게 나에게 오빠, 오빠, 해주는 그녀 덕분에 나는 힘든 회사 생활을 버티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가끔 그녀가 불쌍하다. 그때 그녀가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혹은 그 전화를 받았더라도 그날 저녁에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면... 또는 그 자리에 나왔더라도 그 와인을 마시지 않았다면... 아니면 그 와인을 마셨더라도 그다음 약속을 거절했다면... 삶은 이렇게 무의미한 가정(假定)과 함께 그녀를 벌써 중3, 중1 아들 둘을 둔 학부모이자 선생님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쨌든 그래도 내 인생에서 아직까지도 아주 선명하게 기억되는 2007년 4월의 어느 날 안국동의 밤. 그리고 그렇게 와인을 한병 다 마셔도 아주 또렷하게 기억되는 그날 뜬 달의 모습. 그날 이후 우린 끈질긴 인연(因緣)으로 부부(夫婦)가 되었지. 게다가 해외 주재원 시절에는 부부라는 호칭보다 전우(戰友)라는 호칭이 오히려 더 어울릴 정도로 이국(異國) 땅에서 같이 고생하며 같이 웃고 울었다. 오늘은 한주가 끝나가는 평안한 봄날의 주말. 우린 오랜만에 단 둘이서만 저녁 외식을 하러 나간다. 곱창집이나 막창집 어때? 오늘은 소주 딱 한 병만 해야지, 아님, 청하를 마실까? 애들은 자기들끼리 집에서 배달음식 시켜 먹겠다 하니, 우리끼리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 즐거운 금요일 밤! 2007년 4월 어느 날 밤, 안국동의 기온과 비슷한, 19년이 지난 2026년 4월의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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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부터 이어진, 아내와의 끈질긴 인연(因緣). 그녀를 처음 만났던 학교에서 선후배 간의 교우애(交友愛)로 시작했던 그녀와의 인연은 결국 부부라는 인생의 가장 큰 연(緣)인 부부애(夫婦愛)로 결실을 맺었고 해외 생활을 하며 더 끈끈해진 가족 안에서의 사랑은, 전우애(戰友愛)로 확장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봄이 찾아오면 가끔씩 나는 내가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해서 처음으로 그녀와 나 단 둘이서만 같이 만났던 2007년 4월의 그날 밤이 떠오른다. 노라 존스의 감미로운 보컬이 돋보이는 바로 이 노래와 함께.
(영상) Norah Jones, Come away with me
https://youtu.be/lbjZPFBD6JU?si=CGftVovfeBzCDy5w
(참고 1) 넥타이 매는 법 중 Windsor knot
그 시절엔 정장(正裝)을 착용하고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고 출근을 했다. 지금은 경조사 때만 정장을 꺼내지만 그땐 평일에도 매일 정장을 입었다. 주재원 부임 전까지 계속 착용하던 정장. 다만, 무더운 한여름에만 노타이와 노자켓, 그리고 반소매 와이셔츠가 가능했다. 아무튼, 이제 와서 돌아보니 참으로 올드(Old)하고 또 올드했던 옛 시절.
사진출처
https://www.scribd.com/doc/131213082/Windsor-Knot-Directions
(참고 2) 애틀랜타 연쇄 총격사건
2007년 3월 16일(현지시간)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연쇄 총격 사건으로, 총 8명이 숨지고 23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피해자 중 한인 4명이 포함됐다. 사건 직후 아시아계 혐오 우려가 커졌고, 피해자 구성(한인 포함)과 장소(스파, 마사지숍 등) 때문에 '한인 총격'으로도 언급되고 있다.
(참고 3) 버지니아텍 총격사건
2007년 4월 16일(현지시간) 버지니아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총 32명이 숨지고 23명이 부상을 당한 '무차별 총격'이었다. 특히, 범인의 국적(한국인 영주권자)에 따른 인종 이슈가 언론 보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 피해자와 유가족의 고통과 함께 오랜 기간 슬롯적 오해와 편견을 키우는 요인으로도 거론됐다.
(참고 4) Greyhound 버스
당시엔 뭘 따질 겨를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스마트폰도 없었다. "Greyhound" 버스는 그때 아무런 정보 없이 현지 업체와의 미팅을 반드시 성사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탔던 버스인데, 나무위키에 나온 이 버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주로 비행기를 탈 돈이 없는 저소득층이 많이 이용하며, 특히 미국 남부지방에서는 멕시코계 보따리 상인들이 자주 이용한다. 그래서 실내 분위기도 그렇고, 대도시의 경우는 터미널도 주로 도심의 우범지대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웬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잘 이용하지 않는다. 미국 여행 가이드들을 보면 어떤 도시든 하나같이 도심의 그레이하운드 터미널 주변지대는 우범지대이니 웬만해서는 밤에는 가지 말고 낮에도 주의를 하라는 문구가 거의 필수적으로 들어가 있다. 미국에서 장거리 이동이 필요하다면, 부디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하자. 그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여행객들은 주로 뉴욕과 나이아가라 구간에서 타게 되는데 매우 매우 비추한다. 허리가 아프고 힘들어서 그날 하루 일정은 날아간다고 보면 된다.
(출처: 나무위키)
사진출처
https://www.wkbn.com/news/ohio/bus-leaves-cleveland-for-new-york-ends-up-in-toledo/
(참고 5) 뉴욕 공항 인포메이션 Desk 직원의 안내
당시 미국 출장 때 뉴욕에서 시카고행을 탑승하려 했던 이유는, 시카고에 본사가 있는 업체와 미팅을 한 뒤 그들과 같이 디트로이트로 향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카고행 국내선 탑승에 실패한 나는 뉴욕에서 디트로이트로 바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뉴욕 JFK 공항에서 디트로이트로 가능 방법을 문의해야 했다. 그때 인포메이션 Desk에는 어마어마한 체격의 흑형(黑兄)이 근무 중이었는데, 아직도 나의 뇌리(腦裏)에 담긴 그와의 대화를 몇 자 끄적여 본다.
나 : Pardon, How can I get to Detroit?
(죄송합니다만, 디트로에트에는 어떻게 갈 수 있나요?)
그 : Go to the Bus Terminal and take Greyhound.
(버스 터미널로 가서 그레이 하운드 버스를 타세요.)
나 : What is "Greyhound"?
(그레이 하운드는 뭔가요?)
그 : That's a kind of long-distance bus.
(그건 장거리 이동 버스입니다.)
나 : I want to take the train. Can you tell me how?
(저는 기차를 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 Do you know what Detroit is famous for?
(당신은 디트로이트가 무엇으로 유명한 도시인지 아시나요?)
나 : Isn't it the Motor City called Motown?
(소위 모타운이라고 불리는 자동차 도시 아닌가요?)
그 : Right. Then would there be a railway?
(그렇죠. 그럼 거기에 철도가 있을까요?)
나 : ......
그 : If you really want to take the train,
take it to Toledo and transfer to a bus there.
But wouldn't it be better to just go directly
by Greyhound in that case?
It will take only about 18 hours!!!!
(그럼에도 기차를 타고 싶으면 톨레도까지 가서 거기에서 버스로 갈아타세요.)
(하지만 그럴 거면 그냥 그레이 하운드를 타고 한 번에 가는 게 낫지 않나요?)
(단지 18시간 정도면 되는걸요!!!)
(참고 6) 디트로이트의 미시간 중앙역
디트로이트 시의 구도심(舊都心) 외곽에 있는 미시간 중앙역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폐역(廢驛)이다. 이 역이 지어질 당시인 1910년대에는 디트로이트가 계속 확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심의 살짝 외곽에 중앙역을 위치시켰다. 이 중앙역이 앞으로의 도시 발전의 핵이 되길 바라면서. 그리고 도심지에서 중앙역까지의 접근은 전차 등의 수단을 이용하는 것으로 계획하였지만 곧 1920년대에 대공황이 미국을 덮쳤고, 미국에서 철도는 급속도로 몰락했다. 지금은 역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고 거대한 역사만 외로이 서 있다. 보통 미국에서 이렇게 버려진 역들은 그 아름다운 디자인 때문에라도 다른 용도로 변경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디트로이트는 도시 자체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출처: 나무위키)
(참고 7) 나의 미국 최애(最愛) 도시가 된 시카고!
당시 미국 출장 때 항공편이 꼬였던 덕분에! 나는 무려 주말 이틀을 끼고 시카고에 체류할 수 있었다. 귀국 편은 시카고 오헤어(O’Hare) 공항 탑승 티켓이었으니. 그래서 시카고에서 총 나흘 정도 있었는데, 나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 물론 내가 4월이라는, 아주 날씨가 좋은 시점에 출장을 갔기에 날씨 또한 그 호감도에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시카고는 서울보다 겨울에 더 춥고 여름에 더 더운 몇 안 되는 대도시이기에, 일 년을 거주한다면 그 호감도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음악! 이 음악이 도시의 호감도에 정말 큰 역할을 해줬다. 그때 시카고 시내의 한 재즈 바에서 들었던 Live 재즈 음악은! 내게 정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황홀감을 느끼게 했다. 미국 대도시는 규모 면에서 뉴욕, LA, 시키고 순(順)이라지만 나의 호감도는 그 역순(逆順)이 되었다. 다음은 나무위키에서 찾은, 시카고의 음악에 대한 설명.
시카고는 블루스와 소울 음악, 재즈가 상당히 발달한 곳이기도 한데 1917년 해군 기지화되어 업소가 문을 닫아버린 루이지애나주를 떠나온 흑인 뮤지션들이 뉴욕을 간다는 것을 기차를 잘못 타서 시카고에 내리는 바람에 돈도 없고 어차피 비슷한 대도시니 그대로 눌러앉은 덕에 음악이 발달했다는 믿기지 않는 도시전설이 전해온다. 사실 기차를 잘못 탄 것은 아니고, 뉴올리언스에서 뉴욕으로 바로 가는 철도가 없어 시카고에 들러 뉴욕행 열차를 갈아타고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긴 하다. 물론 몇몇은 뉴욕으로 다시 넘어가 정착하기도 했다. 아무튼 시카고-뉴욕 순으로 재즈가 전해졌던 건 사실이다. 도시전설을 제하더라도 시카고는 여러모로 남부와 북부를 잇는 교통의 요지여서 루이지애나주 흑인들이 많이 정착한 편이다. 이렇듯 시카고라는 대도시에 자리 잡은 블루스와 재즈 뮤지션들은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만들었는데, 기존의 뉴올리언스 기반의 델타 블루스나 딕시랜드 재즈와는 다른, 상당히 세련되고 도회적인 형태였다. 이때의 시카고 재즈 신에서 탄생한 슈퍼스타가 바로 그 유명한 루이 암스트롱.
(출처 : 나무위키)
(참고 8) 시카고의 Skyline
사진출처
(참고 9) 노라 존스의 앨범 "Come away with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