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들어섰는데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왜곡된 작품이 눈앞에 있으면 어떨까.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할 것이다. 의도된 행위이지만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은 새로운 변화를 감지한다. 그림에서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비례를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표현한 작품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인체의 비율을 확대 축소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미 의식이나 슬롯를 비판하고 풍요한 삶과 권력 등에 대한 비판적이거나 비유적인 표현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 비유속에 드러나는 현실 인물을 부각해 그를 통해 드러나는 모순과 정서적인 인간 내면을 드러내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시대에는 통통하다고 표현되는 이들이 사랑받고 어느 시대에는 마르고 비정상적인 것 같은 것들이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각광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다른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드러내길 좋아한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을 평범함이라 헌다.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 평범을 벗어나는 것이 특별함이다. 다름이다. 때로는 과장되고 현실이 아닐 것 같은 것에서 인간은 희열을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풍만(뚱뚱)하거나 홀쭉하다는 것은 평범함을 벗어난 것이다. 진실이나 거짓,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장이다. 시선을 끌어당기는 매개체가 된다. 왜 어느 시대는 풍만한 몸을 아름답다고 했고, 어느 시대는 마른 몸을 통해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했을까. 이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 즉 시대의 시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화가가 그린 것은 인간의 사실적인 체형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가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의 문제에 대한 비판이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많은 그림들과 그리고 작가들의 심리적 표현은 당시 의식을 알려주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중국의 양귀비가 현대의 아름다움에 부합할까. 그림 속의 양귀비는 현재의 마르고 갸름한 여인상이라기보다 통통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의 상징처럼 이야기되는 양귀비가 현재의 미인에도 비견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다. 시대에 따라 미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술은 화가의 표현의식 또는 당대의 슬롯 상황에 의해 후대에는 새로운 관점으로 보이고 비판될 수 있다. 또한 17세기 유럽에서는 풍만한 육체는 오늘날의 비만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가진 자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결국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는 계층의 상징성이었을 것이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