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
김초엽 작가와 함께 시작한 연휴. 이번에 출간한 짧은 소설집은 ‘쓸모’에 대한 이야기. 그렇지만 나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방금 떠나온 세계》에 수록된 〈오래된 협약〉 이후로 나는 김초엽 작가의 소설에서 늘 시간을 찾게 된다. SF 소설들이 시간에 대해 다룬 소설이 많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김초엽 작가의 작품 속에서 시간이 다뤄지는 방식은 다른 작품들과는 좀 다르다고 느껴진다.
표제작은 소설집의 제목을 따왔을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겠지만 ‘시간’을 키워드 삼아 읽으면 다른 작품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첫 번째 수록 작품 〈모래 이야기〉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모래는 순간을 멈추는 능력을 지닌 소녀였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자세히 이야기할 순 없지만 ‘순간을 잘게 쪼개면 시간은 어떻게 시각화될까?’ 같은 질문에 대한 답처럼 보이는 작품이었다. 이야기를 읽을 때는 한 편의 동화 같은 느낌이었지만 읽고 나서 생각해 보면 시간을 아주 잘게 나누었을 때,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천상 과학소설이다.
세 번째 작품 〈끈적이〉의 미라 아주머니는 어딘지 조금 모자라고 어눌한 사람이다. 동네 사람들은 동네가 ‘모범 공동체’에 선정되기 위해 미라 아주머니에게 일을 줄 뿐, 그를 무척이나 답답해한다. 미라 아주머니가 발을 다쳐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청소로봇을 고용해 버린다. 로봇들보다 효율적이지 못하고 일을 해도 무언가 하나씩 흘리고 엉성하게 마무리하는 사람. 한마디로 효율과 쓸모라는 측면에서 많이 부족한 사람. 그런데 미라 아주머니와 주인공이 바카라에 대해 나누는 대화가 무척 인상 깊다. 아미도 바카라이 금지되었거나 혹은 사라진 세상 같은데 그 이유에 대해서 미라 아주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다들 못 견뎌했거든. 그게 요구하는 시간을 말야.” 확실히 바카라은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많은 시간을 낭비해야만 하는 일이다. 미라 아주머니가 일 하는 매무새가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는 것처럼,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그걸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네 번째 작품인 〈사각의 탈출〉에 등장하는 사고언어 전환장치(일종의 통역기 같다. 생각을 언어로 전환시켜 주는) ‘타자수’라는 개념도 무척 흥미로웠는데, 특히 타자수인 인공지능 네모 구조하기 위해 주인공 은수가 네모에게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그런데 옮겨가는 하드웨어는 “필멸성”이라는 전제 조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네모는 뜻밖의 단어인 물체인 ‘연필’로 옮겨가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언어 전환장치였던 만큼 타자수로서 여전히 기능하고 싶은 욕구로 읽었는데, 그런데 연필과 필멸성이 묘하게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쓰면 사라지는 연필. 연필이 종이와 마찰하면서 글씨가 남는 대신 연필심은 닳아 없어진다. 무언가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흘러야만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나는 이 이야기 또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세상이 하도 AI로 난리고,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 그리고 미국의 이란 침공을 겪으면서 AI가 지배하는 전쟁에 대해 여러 글을 읽다 보니, 전쟁이라는 악조차도 이제 AI가 주도하는 세상에서 인간-특히 ’나‘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잦아진다. 그런 시기에 이 바카라을 읽어서 그런지 몰라도 읽는 내내 시간과 쓸모에 대해 생각했다. 하기사 자본주의 슬롯에서 시간은 곧 능력이자 효용이자 쓸모이기도 하니 아주 틀린 접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늘 시간을 허비하고 낭비하기 마련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일들이 으레 그러하다. 정성 들여 음식을 하는 일-육수를 오랜 시간 끓이고, 반죽을 숙성하고, 좋은 날씨를 담아 장을 담그고, 좋은 재료를 손질해서 양념이 잘 스미도록 시간을 잘 재워두고-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야 하는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기다리는 시간을 설렘의 시간으로 바꿔버린다. 쓸모와 효용의 관점에서는 낭비되는 시간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시간을 잘 낭비하는 사람, 그래서 쓸모없는 일을 하면서 그 안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러면서도 계속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노력을 해나가겠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나마 ‘해파리’ 같은 존재가 되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