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엔 시원한 홍콩 액션이지!

살파랑 SPL 시리즈

by달빛바람


홍콩 액션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엽위신(叶伟信, Wilson Yip)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1995년 옵니버스 영화 《야반일점종(夜半一點鐘, 01:00 A.M.)》으로 감독 데뷔했으며, 1980년대 중반부터 스크립터와 조감독을 거치며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침체기에 접어든 홍콩 액션 영화에 《살파랑(SPL)》, 《도화선(Flash Point)》, 《엽문》 시리즈를 통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액션의 쾌감과 드라마의 깊이를 잘 드러내는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이 글은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살파랑> 시리즈에 대한 글이다.


그 시작인 2005년작 <살파랑>은 홍콩 액션영화 특유의 거칠고 육중한 에너지를 잘 응축한 작품이다. 법으로 단죄하기 어려운 악 앞에서 형사들은 제도보다 의리를 선택한다. 왕보(홍금보)는 돈과 조직, 협박과 대리인을 앞세워 법망을 비웃듯 빠져나가는 그 도시의 권력자이다. 그에 맞서는 진국충(임달화)은 증거를 조작해서라도 정의를 붙잡으려 하고, 마군(견자단)은 그런 방식을 경멸하면서도 결국 같은 폭력의 논리에 발을 들인다. 두 사람의 갈등은 단순한 세대 차이라기보다 한 경찰 안에서 충돌하는 두 가치관에 가깝다. 법을 끝까지 믿고 싶은 의지와, 법만으로는 악을 막을 수 없다는 체념이 끝내 서로를 잠식해 간다.

엽위신 감독은 장철과 오우삼이 구축한 낭만적 폭력과 숭고한 희생을 답습하지 않는다. 의리와 바카라임이라는 홍콩 액션영화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그것이 법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낳는지를 냉정하게 바라본다. 진국충(임달화)과 동료들의 의리는 뜨겁지만, 그 열기는 결국 자신들마저 집어삼킨다. 왕보(홍금보) 역시 가족에게는 다정한 아버지이지만 타인의 가정은 거리낌 없이 파괴한다. 영화는 가족애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내 가족만을 위한 사랑이 타인의 삶을 짓밟는 순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드라마의 전개는 인과를 세밀하게 축적하기보다 예정된 비극을 향해 빠르게 질주하는 편이다. 슬로모션과 음악, 가족의 사연을 교차시키는 연출은 감정이 충분히 무르익기 전에 비장미를 앞세운다. 왕보가 추락한 끝에 자신의 가족에게까지 비극이 되돌아오는 결말 역시 현실적인 개연성보다는 업보를 시각화한 장치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러한 투박함은 오히려 작품의 개성이 된다. <살파랑>은 세련된 비극이라기보다 육체와 감정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힘으로 관객을 밀어붙이는 영화이다.

아락(오경)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긴 설명이나 과장된 대사 없이 시선과 걸음걸이, 칼을 쥔 손끝의 움직임만으로 냉혹한 살인자를 완성한다. 마군(견자단)과 골목에서 벌이는 결투는 단순히 합이 뛰어난 액션을 넘어 서로 다른 속도와 리듬이 맞부딪히는 장면이다. 왕보(홍금보)가 권력과 명령을 상징한다면, 아락(오경)은 그 명령이 실제 폭력으로 구현되는 순간을 체현하는 인물이다. 이 작품은 오경이 지닌 냉기와 폭발적인 신체성을 본격적으로 각인시킨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정바오루이(鄭保瑞, Soi Cheang) 감독이 연출한 2015년작 <살파랑 2: 운명의 시간(SPL 2: A Time for Consequences)>은 전편의 틀을 과감히 벗어난다. 일부 배우가 다른 배역으로 다시 등장하지만 이야기는 직접 이어지지 않는다. 1편이 절대악과 형사들의 대결을 중심에 놓았다면, 2편은 장기밀매와 교도소 부패, 마약중독, 백혈병, 가족에 대한 바카라임이 복잡하게 맞물리는 세계를 그린다. 이 작품에서 적은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거래 대상으로 바꾸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심장과 골수는 생명을 살리는 장기인 동시에, 서로 아무런 인연이 없던 사람들을 하나의 운명으로 묶는 매개체가 된다.

토니 자의 기용은 이 작품의 가장 뛰어난 선택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어권 영화에서 언어의 제약으로 주변에 머물기 쉬운 배우를 태국이라는 공간을 적극 활용해 이야기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로 끌어올린다. 그가 연기한 차차이는 백혈병을 앓는 딸의 골수 기증자를 기다리는 교도관이다. 딸 앞에서는 평범한 아버지지만, 부패한 교도소 안에서는 자신의 몸을 마지막 방패처럼 내던지는 인물이다. 그의 액션은 기술을 과시하기 위한 무술이 아니라 딸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육체를 통해 표현되는 언어에 가깝다.

병든 딸 역시 신파를 위한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영화는 아이를 앞세워 눈물을 강요하기보다 차차이와 진지걸(오경)을 연결하는 윤리적 중심으로 활용한다. 차차이(토니 자)는 자신이 감시하던 죄수에게 딸의 생명을 의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진지걸(오경)은 그 아이를 통해 자신이 아직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사람임을 확인한다. 아이의 웃음과 일상은 장기밀매와 죽음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지나친 비장미로 기울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준다.

잠입수사의 후유증으로 마약중독에 시달리는 진지걸(오경) 역시 자칫 비극을 과장하는 인물로 소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중독을 그의 정체성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오랜 잠입수사가 남긴 상처로 바라본다. 그는 연민을 구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망가진 몸으로도 끝까지 행동을 멈추지 않는 경찰이다. 그래서 그의 액션은 승부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자신을 끝까지 버텨내는 과정처럼 다가온다. 1편에서 차갑게 죽음을 집행하던 오경의 몸은 여기서 타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상처를 감수하는 몸으로 변화한다.

장진이 연기한 교도소장 고진은 이 비인간적인 세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죄수와 장기 공급, 해외 거래를 연결하는 관리자이며 감정보다 효율과 통제를 앞세운다. 딸을 살리기 위해 싸우는 차차이(토니 자), 망가진 몸으로도 포기하지 않는 진지걸(오경)과 정반대의 위치에 선 존재다. 세 인물이 마주하는 마지막 2대1 결투는 단순한 선악 대결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신념이 충돌하는 순간으로 완성된다.

이 결투가 지금 다시 보아도 뛰어난 이유는 거대한 폭발이나 과장된 특수효과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배우의 전신과 움직임을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필요한 순간마다 시점을 바꿔 동작의 흐름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벽과 난간, 사슬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거리와 균형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장치가 된다. 편집 역시 액션을 숨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리듬을 만들어내는 도구로 기능한다. 성룡의 액션이 배우가 직접 수행한다는 신뢰를 구축하는 데 집중했다면, <살파랑 2>는 그 신뢰를 유지하면서도 카메라와 편집을 통해 새로운 박자를 만들어낸다. 몸은 끝까지 선명하게 보이지만, 리듬은 이전 홍콩 액션영화와 다른 감각으로 관객을 몰아붙인다.

이 작품이 큰 사연을 품고도 신파에 함몰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물들은 자신의 고통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행동으로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증명한다. 차차이(토니 자)는 딸을 살리고 싶지만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으며, 홍문강(고천락)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동생의 심장까지 빼앗으려 한다. 화숙(임달화)은 조카를 살리고 싶지만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선택 앞에서 끝내 망설인다. 모두가 가족을 이야기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서로 다른 답을 내놓는다. 영화가 말하는 정의는 악인을 쓰러뜨리는 일이 아니라 가장 절박한 순간에도 타인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 선택에 있다.

엽위신 감독이 다시 메가폰을 잡은 세 번째 작품 <파라독스(Paradox)>에는 흥미로운 배경이 있다. 그는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나는 이 영화를 《살파랑》 3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다. 원래는 제목에 '살파랑(殺破狼)'을 붙일 계획이 없었지만, 관객에게 어떤 성격의 작품인지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살파랑》은 인물과 사건이 이어지는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강렬한 액션과 묵직한 드라마를 결합한 하나의 브랜드에 가깝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 작품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하나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주제적 시리즈로 읽힌다.

<파라독스>는 그 주제를 가장 사적인 영역까지 밀고 들어간다. 전작들이 정의와 생명의 가치를 중심에 놓았다면, 이번에는 부성과 죄바카라감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룬다. 고천락이 연기한 이충치는 딸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존중이 아니라 통제로 표현한 아버지이다. 그는 무바카라임하게 가정을 외면한 인물이 아니다. 홀로 딸을 키우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왔다. 그러나 딸의 선택을 믿지 못했고, 자신의 판단이 곧 사랑이라고 확신했다. 영화는 그를 악인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방법을 끝내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 바라본다.

고천락의 절제된 연기는 이러한 모순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 아래에는 바카라임감과 후회, 분노와 죄바카라감이 동시에 스며 있다. 액션 역시 완성된 무술가의 움직임이라기보다 모든 것을 잃어가는 아버지의 몸부림에 가깝다. 그는 화려한 기술을 과시하기보다 맞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몸이 한계까지 몰릴수록 내면의 붕괴도 함께 선명해진다. 이 작품에서 액션은 승리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상실을 견디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오월이 연기한 최걸은 이 과열된 이야기의 균형을 잡아주는 인물이다. 이충치(고천락)가 죄바카라감과 분노를, 탁(토니 자)이 운명과 희생을 상징한다면 최걸(오월)은 가족과 직업 사이에서 흔들리는 평범한 생활인이다. 임신한 아내를 둔 그의 일상은 이충치가 이미 잃어버린 삶을 비춘다. 탁의 죽음 이후 그는 부패한 조직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고, 그 선택은 이야기 전체를 현실의 감각 속에 붙들어 놓는다. 오월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연기가 가족극과 수사극, 액션을 하나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반면 토니 자가 연기한 탁은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영화는 그를 처음 등장시킬 때 사람이나 사물에 닿으면 불길한 징조를 감지하는 듯한 직감을 지닌 인물처럼 묘사한다. 자연스럽게 관객은 그 설정이 사건의 핵심으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충분히 확장되지 못한 채 마무리되고, 탁은 결국 최걸(오월)과 이충치(고천락)를 움직이는 계기로 기능하는 데 머문다. 물론 파국을 예감하면서도 막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살파랑 2》에서 토니 자를 이야기의 중요한 축으로 활용했던 것과 비교하면 활용 폭이 다소 제한적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부패한 형사 반장을 맡은 반(노혜광)을 비롯해 장기밀매 조직원들과 영어를 사용하는 국제 브로커 사샤(크리스 콜린스)는 <파라독스>가 바라보는 악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악은 더 이상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한 명의 보스가 아니다. 정치 권력은 장기를 필요로 하고, 측근은 거래를 설계하며, 조직원은 사람을 납치하고, 의료진은 몸을 해체한다. 모두가 자신의 역할만 수행할 뿐이지만, 그 결과 인간은 하나의 상품으로 분해된다. 과거 홍콩 액션영화가 강력한 악인을 쓰러뜨리며 정의를 완성했다면, <파라독스>는 이미 시스템이 되어버린 악과 맞서는 시대를 응시한다.


마지막 순간, 영화는 다시 엽위신 감독 특유의 윤리의식으로 돌아온다. 이충치(고천락)는 끝내 딸의 심장을 이식받은 시장 후보를 죽이지 않는다. 그것은 용서도, 체념도 아니다. 그를 죽이는 순간 딸의 심장까지 자신의 손으로 멈추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 선택은 복수를 포기한 행위라기보다, 딸을 더 이상 자신의 소유로 붙잡아 둘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가깝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너무 늦게 찾아온다. 그는 딸을 되찾지 못하고, 삶을 회복하지도 못한다. 엽위신 감독은 통쾌한 응징 대신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선택을 남기고, 그것만으로는 이미 벌어진 비극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준다.

결국 《살파랑》 시리즈를 하나로 묶는 것은 화려한 액션이나 거대한 스케일이 아니다. 세 작품이 공통적으로 묻는 질문은 폭력 그 자체보다 폭력을 사용하는 인간의 태도에 있다.

첫 번째 작품에서 엽위신 감독은 정의가 악의 방식을 닮아가는 순간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 법을 넘어선 의리는 결국 자신마저 파괴하고, 선한 의도로 시작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살파랑 2》는 시선을 개인에서 슬롯로 넓힌다. 인간의 몸이 거래되는 세계에서도 누군가는 끝까지 타인을 살리는 선택을 한다. 영화는 운명처럼 얽힌 인물들을 통해 생명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를 이어 주는 바카라임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마지막 《파라독스》는 다시 가장 사적인 자리로 돌아온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통제했던 한 아버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놓아주는 법을 배운다. 세 작품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해 수렴한다. 인간은 극한의 폭력 앞에서도 무엇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가.

이 때문에 《살파랑》은 통상적인 시리즈와는 성격이 다르다. 인물도, 사건도, 배경도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만은 끝까지 이어진다. 법과 운명, 가족과 바카라임이 충돌하는 순간마다 인물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답을 내놓고, 그 선택은 언제나 육체를 통해 증명된다. 액션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인물의 윤리와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언어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살파랑》은 홍콩 액션영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 의미를 한 단계 확장한 시리즈라 할 수 있다. 장철과 오우삼이 구축한 의리와 희생의 정서는 여전히 남아 있고, 성룡과 홍금보가 발전시킨 육체의 리얼리티 역시 이어진다. 여기에 현대 범죄영화가 포착한 국제 범죄와 제도적 폭력이 더해지면서 시리즈는 과거의 문법을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시대와 감독, 배우, 액션의 스타일은 달라졌지만 중심에는 언제나 가족과 바카라임, 그리고 타인의 생명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그래서 《살파랑》 시리즈는 뛰어난 액션영화의 집합을 넘어선다. 세 작품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지만, 끝내 힘의 크기가 아니라 그 힘을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를 선택하는 능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말한다. 화려한 액션은 시간이 지나면 더 뛰어난 기술로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폭력과 정의, 가족과 바카라임을 끝까지 붙들고 질문하는 이 연작의 문제의식은 지금 다시 보아도 여전히 유효하다.

견자단과 크리스 콜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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