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바람의 획

by달빛바람


4월인데, 공기가 자꾸 손에 들러붙는다. 서울의 비탈진 골목은 장미 향기 대신 눅눅한 정적만 고였다. 오늘, 내 가방 속에는 한글 낱말 카드들이 들어가 있다. 다섯 살 정우는 연습장 위에서 'ㄹ'을 그리다 멈췄다. 연필 끝이 허공에서 머뭇거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이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나는 아이의 손을 덮어쥐고 획을 선 안으로 우격다짐하듯 밀어 넣었다. 연필심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길게 남았다. 종이 위에는 내가 만든 '맞는 모양'만 남았다.
"선생님, 이건 나무 팔이에요. 바람 불면 이렇게 흔들려요."
정우가 가리킨 창밖, 가로수의 가지가 꺾인 'ㄹ'처럼 휘청였다. 종이는 거칠게 일어났고, 나는 그것을 몇 번이고 지웠다. 지우개 가루가 연습장 위로 수북하게 쌓였다.
수업이 끝날 무렵, 정우는 내 빈 손바닥에 커다란 'ㅇ'을 꾹꾹 눌러 그렸다. "이건 사탕이에요. 아껴 드세요." 아이의 연필 끝이 지나간 자리가 가렵고 화끈거렸다. 나는 보이지 않는 사탕 하나를 쥔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 안쪽에서 무언가 눅진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대문을 나섰다. 비탈진 골목마다 오후의 햇살이 가파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담장 너머의 장미는 여전히 붉었고, 꽃가루가 골목을 따라 흩날렸다.. 가방의 어깨끈은 여전히 어깨를 짓눌렀고, 손은 자꾸 무언가를 놓친 것처럼 가벼웠다. 골목을 빠져나오는 내내, 텅 빈 손바닥을 자꾸만 접었다 펴보았다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타자의 시선이라는 감옥, 그 화려한 지옥의 몽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