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세상은 온통 매미 소리와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7월인데, 정작 내 마음의 방에는 서늘한 한겨울의 한기가 몰아칠 때가 있다. 계절의 눈부신 푸르름이 오히려 나의 슬픔을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그런 역설의 계절에 최은영의 장편소설 <밝은 밤>을 집어든다.
남편의 배신과 이혼으로 삶이 붕괴된 서른두 살 지연. 이때 친정엄마 미선은 위선적인 사위 편을 들며 지연에게 "네가 참았어야 했다", "이혼은 집안의 수치"라며 정서적 가해를 한다. 상처받은 지연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강원도 소도시의 천문대 연구원으로 이직한다.
그곳에서 지연은 엄마와 불화로 22년간 연락이 끊겼던 외할머니 영옥을 우연히 마주친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같은 아파트 라인에 살고 있었다. 지연은 할머니의 집에서 자신과 외모가 판박이처럼 닮은 흑백사진 한 장을 발견하는데, 바로 증조모 정선의 사진이다. 이때부터 할머니가 지연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백 년에 걸친 4대의 서사가 펼쳐진다.
1930년대 황해도 삼천에서 백정의 딸로 태어난 증조모 정선은 신분 때문에 지독한 차별을 받았다. 일본군 위안부 공출 위험에 처하자 천주교 신자였던 증조부가 그녀를 데리고 개성으로 야반도주하여 부부가 된다.
개성에서 백정 신분이 탄로나 이웃들에게 고립되었을 때, 유일하게 편견 없이 다가와 준 사람이 이웃집 새비 아주머니였다. 새비 아주머니는 정선이 딸을 낳을 때 산파 역할을 하며 헌신적으로 도왔고, 자기 딸과 친자매처럼 함께 키운다. 이 시기 남편들은 돈을 벌러 일본으로 가거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두 여성이 실질적으로 가정을 바카라임지며 생계를 유지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두 가족은 남하한다. 피란길에 대구에 정착해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 여기서부터 정선의 딸, 영옥의 서사가 펼쳐지는데, 부디 행복하기를 바랐건만 남편의 바람과 폭력으로 얼룩진 기구한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영옥에게 유일한 위안은 과거 개성에서의 추억뿐이다.
엄마 미선은 어머니 영옥의 불행을 보며 "나는 절대 엄마처럼 무력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미선 역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남편과 결혼하게 된다. 미선에게는 큰 트라우마가 있는데, 바로 첫째 딸을 일찍 떠나보낸 아픔이다. 자식을 잃은 고통과 불행한 결혼생활이 겹친 미선은 점점 날카로워졌고, 그 화풀이를 고스란히 딸 지연에게 쏟아부었다. 미선은 불행의 원흉은 엄마라고 여기고 영옥과 등을 지게 된 것이다.
자식과의 갈등으로 외롭게 늙어간 할머니의 삶이 지연의 현재와 촘촘하게 교차하는 구성이 흥미롭다. 지연은 할머니의 고백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면서 소설을 이끌어간다. 굳어있던 지연의 마음에도 서서히 물길이 트이기 시작하며 타인의 고통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행위가 어떻게 현재의 나를 치유하는지 소설은 증명해 낸다.
희령에서 할머니 영옥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증조모부터 내려온 여성들의 구체적인 생존담을 들으며 지연은 비로소 나를 기만했던 남편과 나에게 상처를 준 부모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내가 겪은 고통이 나만의 잘못이 아님을 깨닫고 스스로를 용서하게 된다.
바카라을 덮고 나면, 7월의 번잡한 더위 대신 가슴속에 햇볕에 잘 데워진 돌멩이 하나를 쥔 듯 단단하고 따스한 온기가 감돈다. 삶이 아무리 가시덤불 같을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다음 계절로 걸어갈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다.
뜨거운 여름밤, 내 삶을 만들어낸 과거의 수많은 기억과 마주하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깊고 맑은 물길 같은 소설을 권한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p.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