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혼란

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by은파랑

혼란이라는 말에는
섞을 혼(混) 자가 들어있다.

혼(混)은 물 수(水)와
함께 곤(昆)이 만난 글자다.

여러 줄기의 물이
한데 어우러져 흐른다는

그런 뜻이었다.

뒤에 오는 란(亂)은
어지러울 란이다.

옛 글자의 모양은
두 손이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는 모습

그런데 이 글자에는
다스린다는 뜻도 함께 들어있다.

'서경'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신하를 두고
란신(亂臣)이라 적은 대목이 있다.

엉킨 것과
엉킨 것을 푸는 일이

한 글자 안에
나란히 살고 있었던 것

비슷한 말로 혼돈이 있다.
혼돈은 하늘과 땅이
아직 갈라지기 전의 상태

처음부터 아무 질서도 없던 자리

하지만 혼란은
질서가 있었던 자리에서만 생긴다.

혼돈이
아직 맑아본 적 없는 물이라면

혼란은
맑았던 물에
흙이 풀린 것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고 믿었던 어느 날
작은 말 한마디에

마음 바닥의 흙이
한꺼번에 일어나던 저녁

손을 넣어 휘저을수록
물은 더 탁해졌고

그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그러다 알았다.

가라앉는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하는 일이라는 것

손을 거두고
곁을 지키자

흙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고

탁했던 물 위로
얼굴이 조금씩
다시 비치기 시작했다.

혼란이란
질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맑음이
다시 오기 전의
잠시 흐린 시간


은파랑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brunch membership
은파랑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은파랑은 얘기꾼입니다.

5,30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339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36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7화열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