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100년 무렵, 로마의 노예였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해 품은 생각이다."
몸이 묶인 채 살아본 사람의 말이었다.
그는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어도
일을 대하는 마음의 자리는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이천 년 뒤, 스탠퍼드의 심리학자 제임스 그로스는
오래된 믿음을 실험실로 가져왔다.
1993년, 참가자들에게 불편한 영상을 보여주고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쓰게 했다.
한 무리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느낌을 겉으로 드러내지 마세요."
다른 무리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장면을 의사의 눈으로, 차분히 바라보세요."
겉으로는 두 무리 모두 조용했다.
그러나 몸은 달랐다.
감정을 눌러 담은 사람들은
표정은 잠잠했는데 몸속 긴장은 더 높아졌다.
장면의 의미를 다시 바라본 사람들은
괴로움 자체가 줄어 있었다.
그로스는 이를 두 이름으로 나누었다.
억제, 그리고 재평가.
억제는 이미 켜진 불 위에 뚜껑을 덮는 일이다.
재평가는 불이 붙기 전에 불이 무엇을 태우는지 다시 읽는 일이다.
뚜껑은 연기를 숨기지만
불은 속에서 계속 탄다.
우리도 그렇게 하루를 건넌다.
회의실에서 들은 말 한마디를
"괜찮아" 하고 눌러놓고 돌아온 저녁,
이유 없이 어깨가 굳고
밥맛이 없고
작은 일에 날카로워지는 밤이 있다.
눌러둔 감정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방으로 옮겨 간 것이다.
감정을 다룬다는 것은
이기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휩쓸리는 일도 아니다.
감정이 온 것을 인정하고,
무엇이 이 불을 붙였는지 묻고,
일의 뜻을 한 번 더 읽어보는 일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다"는 문장 옆에
"저 사람도 오늘 많이 지쳐 있었다"는 문장을
조용히 놓아보는 일이다.
사실이 바뀌지 않아도
마음이 서 있는 자리가 바뀌면
같은 장면이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노예의 몸으로도 마음의 자리를 지켰던 철학자는
이렇게도 말했다.
"일어나는 일을 내 뜻대로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일 앞에서 어디에 서 있을지는 언제나 나에게 달려 있다."
감정은 다스려야 할 적이 아니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할 도구다.
거세게 일어도 괜찮다.
서두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고,
뚜껑을 덮는 대신 창문을 열고,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바라보면 된다.
오늘 밤 마음에 불이 붙어 있다면
끄려고 애쓰지 않아도 좋다.
무엇을 태우고 있는지
함께 바라봐 주면 된다.
그렇게 들여다본 불은
어느새 방을 데우는
작은 온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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