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는 자리를 가만히 짚어보는 저녁

by은파랑

소모(消耗).
쓰는 사이에 조금씩
닳아 없어진다는 뜻

닳는 것은 소리가 없다.
신발 밑창이 한 계절 만에 얇아져 있어도
걷는 동안에는 알지 못한다.

마음도 그렇다.
어디서 닳고 있는지 모른 채
하루가 지날 때마다
조금씩 얇아진다.

2004년, 프린스턴 대학교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동료들과 함께 텍사스의 여성 아홉백아홉 명에게
이상한 숙제를 내주었다.

어제 하루를
영화의 장면처럼 한 컷씩 나누어 떠올려보라.

아침에 일어나 준비하던 시간,
출근길, 일하던 시간,
점심, 퇴근, 집안일, 누군가와의 대화

그리고 장면마다 물었다.
이때 나는 어떤 기분이었는가
즐거웠는가, 지쳤는가, 불안했는가

하루를 통째로 평가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장면으로 나누자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기분이 낮았던 시간은
오가는 길과 일하는 시간, 집안일이었고
가장 환했던 시간은
가까운 사람과의 시간,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같은 일이라도
누구와 함께였는지에 따라
빛깔이 달라졌다.

연구자들은 이 방법에
하루 재구성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루는 한 덩어리가 아니라
조각들의 이어 짐이었고
소모는 조각 중
어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피곤하다는 말이
아침부터 입안에 맴돌아도
나는 무엇이 나를 지치게 하는지
오래 짚어보지 못했다.

일이 많아서 그렇겠지,
요즘 잠이 부족해서 그렇겠지,
이유는 언제나 크고 흐릿했다.

그러다 어느 저녁
수첩을 펴고
하루를 장면처럼 쪼개어 적어보았다.

아침 지하철,
전 회의,
점심 이후의 메시지 답장,
퇴근길에 걸려온 전화 한 통

그리고 장면 옆에
작은 표시를 해보았다.
돌아본 뒤에도 가슴이 따뜻한 곳에는 동그라미,
어깨가 내려앉는 곳에는 세모

그날 저녁
세모는 놀랍게도
가장 바쁜 시간이 아니라
퇴근길의 그 전화 한 통에 모여 있었다.

그동안
일이 나를 지치게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정작 닳고 있던 곳은
이유 없이 맞춰주어야 했던
몇 분의 대화였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무언가를 당장 바꾸는 일이 아니다.

닳는 자리를
손끝으로 짚어보는 일

의사는 아픈 곳을 눌러보고서야
어디를 치료할지 정한다.
아프냐고 묻기 전에는
어느 곳이 아픈지
환자조차 알지 못한다.

마음의 진찰도 그렇다.
오늘 하루를 장면으로 나누어
조용히 눌러본다.

여기는 괜찮고
여기는 조금 아프고
여기는 한참 전부터 아파 있었구나

그렇게 알게 되면
조금씩 길이 보인다.

닳는 자리에는
덧댈 것을 마련하고
꼭 지나야 하는 길에는
숨 쉴 틈을 하나 만들어둔다.

그리고 나를 채우는 자리는
조금 더 자주 찾아간다.

소모를 아는 사람은
무엇이든 줄이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나를 지키는지도
함께 아는 사람이다.

오늘도 하루가 저문다
수첩을 열어두고
창가의 빛이 기우는 동안
조용히 하루의 장면들을 되짚는다.

그리고 동그라미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문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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