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 리뷰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박문재 옮김. 2025. 현대지성
영화 <오디세이>를 본 후에 바카라리뷰와 함께 쓰려고 벼르다가 영화를 못 본 채 바카라리뷰를 먼저 쓴다.
요즘 온라인카지노 카지노 게임에 바카라 리뷰 몇 편을 올렸는데, 서로 다른 바카라들이 다같이 한 가지 키워드로 내게 다가온다. "집"이다.
<아우스터리츠>(W.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2026 초판15쇄. 을유문화사)에서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집을 찾아간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를 통해 체코에서 영국으로 보내진 아우스터리츠가 체코를 떠나기 전의 건물들과 사람들을 만나는, 집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앤디 위어 지음, 김동혁 옮김. 2021. (주)알에이치코리아)는 우주생활의 끝, 지구귀환 무렵 집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이건 더 이상 자살임무가 아니다. 제대로 패를 내기만하면 나는 세상을 구할 뿐만 아니라 집에 간다. <프로젝트 헤일메리>498쪽.
나의 옆지기는 수십년 동안 세계 여러나라를 다니며 일했다. 그는 귀국할 때, 체크인하고 출국게이트를 지나 라운지에 가서 앉으면 메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한다. "이제 라운지에 들어왔어. 집에 간 거나 마찬가지야." "집에 다 간 거야." 아직 탑승을 하지 않았어도 집에 간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요즘은 기내에서 인터넷을 하니까 탑승하고 자리에 앉으면 또 메세지를 보낸다. "자리에 앉았어. 집에 다 간 거야."
집! 요즘 나에게 새롭게 떠오른 키워드 집. 오디세우스는 전쟁 후 집에 가기까지 10년이나 걸렸다. 트로이전쟁이 10년 걸렸으니 그가 집을 떠난 후 귀향할 때 까지는 20년의 세월이 지난 것이다. <오디세이아> 바카라리뷰는 이런 맥락으로 시작한다.
<오디세이아>를 다시 읽은 것은 뜻밖에도 바다의 색 때문이었다. 색에 관한 글을 쓰면서 호메로스의 바다가 마음에 걸렸다. 바다를 말하면서도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떠올리는 ‘파란 바다’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바다는 포도주처럼 짙고, 검고, 잿빛이고, 안개에 잠기고, 햇빛을 받아 번쩍인다. 때로는 색이라기보다 빛이나 깊이, 움직임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래전부터 호메로스의 색채 표현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의 색채 어휘가 오늘날과 달랐다는 설명도 있고, 색상 자체보다 밝고 어두움, 광택과 질감에 더 민감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오디세이아>를 읽다 보면 어느 쪽이 옳은가를 가리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생각이 든다. 호메로스에게 바다는 하나의 색으로 고정될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바다는 끊임없이 변한다. 빛에 따라 달라지고 바람에 따라 표정을 바꾼다. 사람을 목적지로 데려다주다가도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빼앗는다. <오디세이아>의 바다는 어느 순간 색보다 움직임이 눈에 들어온다.
그 바다 위에 한 사람이 있다. 전쟁 후 귀향길에 오른 오디세우스.
우리는 오디세우스를 위대한 모험가로 기억한다. 키클롭스를 속이고, 키르케의 마법에서 벗어나고,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도 살아남으며, 죽은 자들의 세계까지 다녀온 영웅. 그러나 다시 읽어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오디세우스는 애초에 모험을 찾아 떠난 사람이 아니었다.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땅도 새로운 왕국도 아니었다. 목적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타카였다. <오디세이아>는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모험담이라기보다, 멀리 떠나온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 이야기다.
칼립소의 섬은 특별하다. 아름다운 여신과 함께 머물 수 있고,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으로부터도 벗어날 가능성이 주어진다. 그런데도 오디세우스는 바닷가에 앉아 고향을 바라보며 운다. 불멸보다 이타카를 택하는 사람. 더 좋은 곳, 더 아름다운 곳, 더 안전한 곳이 아니라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이다.
그때부터 <오디세이아>의 수많은 섬들은 목적지가 아니라는 공통점을 갖게 된다. 아무리 아름답고 신비해도 그곳은 집이 아니다. 오디세우스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이다.
오디세우스가 공간을 떠도는 동안 이타카에서는 또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다. 페넬로페는 떠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녀의 시간이 평온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 앞에는 베틀이 있다.
페넬로페는 시아버지 라에르테스의 수의를 다 짜면 구혼자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낮에는 베를 짜고 밤에는 그것을 다시 푼다. 낮 동안 앞으로 간 시간이 밤이면 다시 뒤로 돌아간다. 영화에 이 장면이 삽입되었는지, 어떻게 그려졌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름대로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의 시간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이 장면을 생각하면 오디세우스의 항해와 페넬로페의 베틀은 묘하게 닮아 있다. 오디세우스는 바다를 건너 앞으로 나아가지만 폭풍에 밀려 다시 멀어진다. 페넬로페는 실을 짜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밤이면 다시 풀어버린다. 한 사람은 공간을 떠돌고, 한 사람은 시간을 붙들어둔다.
바다는 오디세우스를 이타카로부터 밀어내고, 베틀은 페넬로페가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낸다. <오디세이아>의 귀향은 오디세우스 혼자 이루어내는 일이 아니다. 한쪽에서는 돌아오려고 애쓰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돌아올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긴 세월 끝에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이타카에 도착한다.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곧바로 오디세우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거지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자신의 이름을 감춘다. 여기에서 <오디세이아>의 또 다른 흥미로운 질문이 생긴다.
돌아온 사람은 떠났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트로이 전쟁을 겪었고 수많은 동료를 잃었으며 바다를 떠돌았다. 이름을 속였고 신분을 감추었으며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아무도 아닌 자’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돌아온 사람을 무엇으로 알아볼 수 있을까.
그를 먼저 알아보는 것은 말이 아니라 몸이다. 늙은 유모 에우리클레이아가 그의 발을 씻기다가 오래된 흉터를 발견한다. 오디세우스가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흉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흉터는 몸에 남아 있는 과거다. 이름을 감출 수는 있어도 살아온 시간을 지울 수는 없다.
영웅의 귀환을 증명하는 것이 그의 전쟁담이나 명성이 아니라 몸에 남은 작은 상처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거대한 서사시가 갑자기 한 인간의 몸으로 좁혀진다.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를 시험한다.
유모는 알아보았지만 페넬로페는 쉽게 믿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귀환은 기쁨이기에 앞서 의심일 수 있다. 20년 동안 수많은 소문과 거짓말을 견뎌온 사람에게 누군가 나타나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곧바로 믿을 수 있을까.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를 시험한다. 그 시험에 등장하는 것이 뜻밖에도 침대다.
페넬로페가 하녀에게 부부의 침대를 방 밖으로 옮기라고 말하자 오디세우스는 화를 낸다. 침대는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올리브나무를 중심으로 침실을 만들고, 그 나무의 줄기를 깎아 침대의 한쪽 기둥으로 삼았었다. 침대를 옮기려면 나무를 잘라내야 한다. 비밀을 아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다.
그제야 페넬로페는 돌아온 남자가 오디세우스임을 받아들인다.
이 장면에 이르자 처음 바카라을 펼쳤을 때 궁금했던 바다의 색이 다시 떠올랐다.
<오디세이아>의 시작에서 나를 붙잡은 것은 한 가지 색으로 말하기 어려운 바다였다. 바다는 끊임없이 움직였고 오디세우스를 밀어냈으며 그의 삶을 예상할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 위에서 그는 왕이었다가 표류자가 되고, 영웅이었다가 거지가 된다. 자신의 이름마저 ‘아무도 아닌 자’로 바꾸었다. 그토록 많은 것이 변하는 이야기가 마지막에 가서 붙잡는 것은 놀랍게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침대. 그것도 땅속에 뿌리를 내린 살아 있는 나무에서 시작된 침대다.
바다는 경계가 없지만 침대에는 자리가 있다. 바다는 사람을 떠돌게 하지만 침대는 한 사람이 머물 곳을 정해준다. 바다에서는 이름을 감추어야 살아남았지만, 침대 앞에서는 오디세우스가 누구인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오디세우스의 긴 항해는 이 침대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읽고 나니 <오디세이아>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수많은 괴물과 신과 마법이 등장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놀랄 만큼 소박한 인간의 욕망이 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떠났던 장소에 다시 도착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돌아왔을 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내가 떠나기 전에 살았던 시간과 돌아온 뒤의 시간을 이어주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에우리클레이아에게는 흉터가 그것이었고, 페넬로페에게는 침대의 비밀이 그것이었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이타카의 해안에 발을 디딘 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그를 알아보고, 마침내 두 사람이 공유했던 기억에 닿았을 때 비로소 끝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냉동인간이 어느 시점엔가 깨어나 삶을 이어가는 설정의 이야기에 감동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나라면, 냉동만 풀리면 내 삶이 이어진다면, 그래도 나는 이전에 알던 사람들이 다 사라진 세상에 다시 삶이 이어지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물론 사람뿐 아니라 익숙한 환경이 사라진 낯선 세상도)
색을 찾아 <오디세이아>를 다시 펼쳤는데 마지막에 남은 것은 색이 아니었다.
파랗다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얼굴을 가진 바다와, 그 바다를 건너온 사람. 긴 세월 동안 한자리에서 뿌리를 지키고 있던 올리브나무 침대. <오디세이아>는 세상을 떠돈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무리 멀리 떠돌아도 끝내 돌아갈 자리를 잊지 않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다. 문학적 해석과는 달리 개인의 독후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