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등이 젖어 잠에서 깨는 당신에게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의 얼굴에는 서늘한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54세, 생리가 멈춘 지 어느덧 1년 반.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참아온 숨을 내뱉듯 밤마다 등이 축축하게 젖어 잠에서 깨는 고통을 털어놓았다.
하루 단 3시간의 쪽잠. 그 몸을 이끌고 그녀는 마트에서 온종일 서서 일한다. 퇴근 후에는 다시 '엄마'와 '아내'라는 이름표를 달고 가족들을 챙겨야 한다. 쉴 틈 없는 일상이지만, 그녀의 헌신은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겨지곤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마음 한구석도 일렁였다. 나 역시 일하는 엄마이기에, 퇴근 후 현관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의사'에서 '엄마'로 모드 체인지를 하는 그 짧은 정적의 무게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겪는 증상은 전형적인 '갱년기 증후군'이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그 기전은 꽤나 복잡하고 정교하다.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면, 우리 뇌 하수체에 있는 체온 조절 중추의 민감도가 변한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을 미세한 온도 변화에도 몸은 비명을 지르며 땀을 쏟아내고, 그 여파로 깊은 잠을 방해받는 것이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몸 안의 센서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생물학적인 신호다.
더 힘든 것은 몸의 변화와 함께 찾아오는 감정의 파고다. 가족을 향한 무한한 헌신, 그리고 그 노력이 당연시되는 것에서 오는 공허함이 호르몬 변화와 맞물려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마음은 자꾸만 차갑게 식어가는데 몸은 뜨거워지는 그 괴리감 속에서 그녀는 홀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진료실을 찾는 많은 환자는 내가 무조건 호르몬 치료를 권할까 봐 겁을 내며 들어온다. 호르몬 치료가 명확한 해답이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유방암 위험이 커지거나 몸에 나쁜 영향을 줄까 봐 복용을 망설인다. 하지만 갱년기 치료에는 단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호르몬제 복용이 가능한 이들에게는 호르몬을 처방하지만, 유방암 수술 후이거나 가족력이 있는 경우, 혹은 간 수치가 좋지 않아 치료를 망설이는 경우에도 길은 열려 있다. 호르몬을 꺼려하는 여성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여러가지 치료들이 있다.
잠을 편히 잘 수 있도록 도와 다음 날의 활력을 되찾아줄 수도 있고, 체온 조절 중추의 예민함을 낮추는 비호르몬성 약물을 사용할 수도 있다. 때로는 태반 주사 같은 대체 요법이 훌륭한 대안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환자의 상태와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며 '나에게 맞는 길'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다.
나는 여성에게 있어 갱년기란 지난 50여 년간 열심히 살아온 몸을 '재설정(Reset)'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남은 인생을 더욱 아름답고 건강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진료실에서 나는 늘 이런 마음으로 환자들과 마주한다.
그날 진료실을 찾은 그녀에게도 호르몬 치료의 필요성을 차근히 설명했다. 다행히 초음파 검사와 얼마 전 시행한 건강검진에서 특별한 이상이 없었기에 호르몬제를 1개월 처방했다. 여기에 갱년기 시기에 함께 수치가 떨어지는 멜라토닌을 잠들기 전 복용하도록 함께 처방하며, 우리는 한 달 뒤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무언가 증상을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을까. 진료실을 나서는 그녀의 표정이 처음 들어올 때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퇴근 후 현관문 앞에서 숨을 고르며 다시 누군가의 지지대가 되기 위해 애쓰는 수많은 그녀들을 생각해 본다. 나 역시 그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는 사람이기에, 당신의 고단함이 얼마나 깊은지 잘 안다. 밤마다 등이 젖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예민해서가 아니라, 단지 몸이 보내는 작은 신호일뿐이다. 그러니 부디 홀로 땀을 훔치며 불면의 밤을 지새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밤은 부디 땀에 젖지 않는 깊은 잠을 자고, 내일 아침은 당신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