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이상 다니던 온라인 게임을 관두기 위해서는 오래 생각해야 했다.
지금이 내가 벌 수 있는 가장 큰 금액을 버는 것일텐데, 이걸 포기하고 영어 공부하러 가는게 맞는 것일까? 그래서 정말 오래 고민했다. 그런데 돈 때문에 또 뒤로 미루게 된다면, 나는 영영 갈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가자, 가고, 다녀와서 돈을 다시 벌자. 그 때는 아마 새로운 일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테고, 나의 경력은 단절되는 것일테니 월급은 반토막이 나겠지. 영어 실력이 정말 늘어서 온다면, 공항이나 호텔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물류센터나 편의점에서 일하면 되겠지. 뭐가 됐든 다시 벌자, 조금 벌더라도 할 수 없지, 내가 선택한 일이다.
그렇게 나는 매달 들어오는 월급을 포기하고, 20년이상 일했던 회사에 퇴사를 알렸다. 이제야 뒤늦게 영어 공부를 하러 가고 싶노라고 내 뜻을 전하니 회사의 모든 분들이 축하해주셨고, 떠날 때에는 많은 분들이 공부하고 외국에서 사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격려금을 주셨다. 그리고 회사로부터는 제안을 받았다. 공부하고와서 다른거 할 거 아니라면, 회사에 다시 돌아오라고. 나는 감사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른 데를 갈거라면, 다니던 회사를 가는게 나을테니까. 그렇게 내년에 돌아오겠습니다, 인사하고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는 돌아왔다.
한국에 머물면서 회사 사람들로부터 종종 연락을 받았다. 한국에 왔냐, 언제 올것이냐, 오는건 확실하지 등등. 나는 사실 다른 일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기는 했지만, 다른 일은 백퍼센트 급여가 낮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다니던 회사를 찾아가 5월부터 다시 일하겠노라고 알렸다. 모두들 다시 오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해주어서 내 마음도 좋았다. 그리고 오늘, 이력서를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 재입사 결재를 득하려면 서류를 준비해야 하는데 이력서를 보내달라는 거였다.
나는 한 온라인 게임에 오래 다닌만큼 사실 어디에도 기록해둔 이력서가 없었고, 그래서 부랴부랴 아침에 일어나서 작성을 시작했다. 학력과 경력 그리고 운전면허증 1종보통 자격증을 적는건 예전과 같았지만, 나는 이제 거기에 한줄을 더 적었다.
교육/연수
K***** International Languages, Singapore <Diploma in Professional Business English> 과정 수강
와- 뭔가 뿌듯했다.
6개월 공부했다고 나의 영어 실력이 기적처럼 향상된건 아니고, 그래서 몹시 초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싱가폴에서 6개월간 수업을 들은건 사실이므로, 이력서에 저걸 한 줄 더 채워 넣으면서 새삼 뿌듯했다.
연차가 쌓이고 진급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나는 입사 지원자들의 서류를 검토하고 면접을 보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대부분의 이력서에 어학연수 가 포함되어 있는걸 보고, 와, 나 지금 대학 졸업했다면 회사 들어가기 힘들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학연수를 다녀왔을까, 대단하다, 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이제 내가, 내 이력서에 어학연수 를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력서에 이거 한 줄을 추가하게 되는건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온라인 게임을 오래 다닌만큼 이력서 라는 존재에 대해 잊고 살았으니까. 막연하게 다녀오면 새로 취업해야겠지, 라고만 생각하고 '그러나 이력서가 달라질 것'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부랴부랴 입사를 위해 이력서를 작성하면서, 저 한 줄을 더 적어넣는 순간, 너무 좋았다. 이걸 위해 다녀온 건 아니지만, 다녀왔더니 이렇게 한 줄 추가가 가능해져서 좋았다. 앞으로 또 이력서를 제출하게 될 일이 또 있을지 모르겠으나, 별 적을 거 없는 이력서에 한 줄 더 추가하게 된 것이 너무 좋다. 나는 오늘 아침, 좀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