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 아비투스> 취향에도 계급이 있다.
우리는 흔히 취향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취미, 말투와 행동은 모두 '나'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개인의 선택이라고 믿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살아온 환경과 교육 속에서 몸에 밴 습관이라는 것이다.
최근 한 모임에서 그 말을 실감했다. 부촌의 한 가정의 오후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엄마들과 아이들은 모두 단정한 차림으로 시간을 맞춰 도착했고, 테이블에는 샐러리와 오이, 방울토마토, 크래커 같은 담백한 음식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스낵도 있었지만, 나쵸와 간단한 소스를 곁들인 정도였다.
첫 초대였던 나는 아이들도 온다는 말에 초콜릿과 설탕이 듬뿍 올라간 도너츠 한 상자를 사 갔다. 이전에 갔던 모임에서는 아이들이 손으로 집어 순식간에 먹어 치웠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아이들은 도너츠를 마구 집어 먹기보다 "반만 잘라 주세요."라고 말하거나, 익숙한 듯 채소와 크래커를 먼저 집어 들었다. 도너츠도 손으로 반을 쪼개기보다 접시에 올려 나이프로 반듯하게 잘라 아이에게 건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천천히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곁들였다. 어떤 모임에서는 대화보다 음식을 먹느라 바쁘고, 주인은 음식을 나르느라 계속 자리를 비우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2~3시간 동안 누구 하나 부산스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음식은 주인공이 아니라 대화를 위한 배경 같았다.
문득 예전 모임들이 떠올랐다. 약속 시간보다 한참 늦게 와서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음식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고 허겁지겁 먹던 사람들. 대화보다 먹는 데 더 집중하고, 손으로 집어 먹으며 배를 채우는 데 바빴던 풍경. 그 모습 또한 내게는 너무 익숙한 풍경이었다.
내 시선은 내가 가져간 도너츠 상자로 향했다. 누가 먹나, 몇개가 사라지나, 자꾸 신경쓰였다. 아이들은 그렇다 쳐도 어른들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대부분 군살이 없는 몸매였고, 자기관리가 생활처럼 몸에 밴 사람들처럼 보였다. 모임이 끝날 무렵, 큰 도너츠 상자에서는 겨우 몇 개만 사라져 있었다.
'아니, 어떻게 도너츠를 안 먹을 수가 있지?!'
돌아오는 길, 문득 <아비투스>의 계급이 취향을 반영한다는 아비투스 문구가 떠올랐다. 무엇을 먹는지, 어떻게 먹는지, 음식을 대하는 태도, 시간을 지키는 습관까지.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오랫동안 몸에 밴 생활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배우기 전에 부모의 생활방식을 먼저 배운다.
나의 외로운 도너츠 상자가 마치 내 취향을 드러내는 것 같아 조금 민망했다. 나를 평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모두 고맙다며 반갑게 받아 주었다. 민망했던 것은 도너츠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익숙한 기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마주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취향은 생각보다 개인적이지 않다. 그리고 부모의 취향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아이의 취향이 된다. 순간,'나는 지금 아이에게 어떤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도너츠를 좋아하는 것도, 샐러리를 즐기는 것도 모두 하나의 취향일 뿐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런 사소한 일상의 선택들이 쌓여 한 집의 문화가 되고, 그 문화가 아이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 즉 아비투스가 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내가 아이에게 물려주는 것은 돈이나 학력이 아니라, 매일의 식탁에서, 약속 시간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조금씩 만들어지는 삶의 습관일지도 모른다. 어떤 아비투스를 물려주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