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중고등학생이 되면 공부한다고 가족 여행 못 간다던데 하며 학년 초에 뜬 학사일정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작년엔 없었던 것 같은 봄방학 일정이 눈에 띈다. 작년에는 5/2에만 재량휴업일이었고 올해는 근로자의 날과 어린이날이 껴서 그런가 아예 '봄방학'이라는 타이틀로 5일 동안 학교를 안 가네, 그러면 놀러가야 하는 거 아냐...?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여행을 예약했던 학기 초에는 근로자의 날이 공식 휴일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재량으로 노는 날이었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체험학습을 신청하는 일도 단 하루면 되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번에도 우리 가족을 가만히 두지 않고 전쟁을 일으켰고 (우리 가족은 2020년에 트럼프의 뻘짓으로 인해 비행기 관련으로 금전적 피해를 본 적이 있다) 유류할증료 인상이라는 변수가 생겼지만 다행히 이미 결제가 된 터라 비껴 살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어찌저찌 해서 도착한 도쿄. 일본은 오사카 이후 2년 만이었고 도쿄는 20여년 전에 MBC 촬영 출장으로 현재는 국회의원이 된, 신입사원 한준호 아나운서와 갔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분이 배지를 달 동안에 나는 뭐했냐고 도시가 묻는 것 같았다. 나? 일본어를 읽고 쓰고 말하는 11살 어린이를 낳고 키워서 데려왔잖아. 여행지를 일본으로 정한 것도 아이의 영향이 컸다. 배트맨을 덕질하고 아이돌을 덕질하는 부모가 낳았으니 아이도 덕후로 태어난 것은 유전일 터. 좋아하는 캐릭터가 일본 캐릭터인지라 혼자서 일본어를 독학해서 읽고 쓰고 말하는 걸 보면서 그야말로 '현장학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한자는 모르지만 영어를 잘하는 영국 국적 아버지와, 한자도 알고 한국어도 영어도 알지만 일본어는 모르는 어머니인 나와, 한자는 어느 정도 알고 영어도 어느 정도 하고 일본어도 어느 정도 하는 어린이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영어를 잘하는 직원을 만나면 아빠가 말을 했고 영어를 못하지만 한국어를 알아듣는 직원을 만나면 내가 말했고 아무 것도 못하는 직원을 만나면 아이가 말했다. 셋이 절대 떨어지면 안 돼! 딱 붙어있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백화점에 갔을 때였다. 어쩐 일인지 그 백화점의 층별 안내에는 영어가 단 한글자도 없었는데 친정엄마에게 어버이날 선물로 줄 가방을 그 백화점에서 판다는 건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아이야, 그 브랜드 이름이 이건데, 뭐라고 쓰여 있는지 모르겠어.. 몇 층에서 판다는 거야?
층별 안내를 주욱 훑어보던 아이는 "ㅇ..ㄹㅂ...이거야? 00층이네."라고 말했는데 그때 나는 그동안 구입했던 일본어 바카라과 일본어 학습앱(유료)과 일본인 선생님에게 들였던 수고가 빛을 발하는 걸 느꼈다. 아리가또 미나상!! 아무도 못 읽었다면 각 층마다 다 들러서 안 그래도 안 좋은 무릎이 나갈 뻔했다. 아이는 한국에서는 쉬이 팔지 않는 일본 캐릭터 굿즈들을 살 수 있어서 기뻐했다. 특히 우리가 갔을 시기에 일본의 인형뽑기 회사와 그 캐릭터가 콜라보를 해서 여러 굿즈를 뽑을 기회가 있었는데 인형뽑기가 될리가 있나.. 그런데 옆에서 우리가 고생하는 것을 본 영어권 팬들이 자기가 뽑은 굿즈를 우리집 어린이에게 선물로 주었다. 우리도 그 사람들이 옆에서 고생하는 것을 보긴 했는데 그래도 이리저리 많이 뽑은 것 같긴 했다. 나는 아리가또 대신 땡큐 땡큐를 연발하며 다같이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그런 친절함을 경험했던 다음 날. 아이가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가보면 안 되냐고 해서 또 인형뽑기 가게에 갔다. 어제 아이가 뽑고 싶어했던 게임기는 아예 비워져있었다. 영어를 못하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번역기를 돌려서 보여주는데 '품절입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지. 이 가게는 체인점이었기 때문에 조금 걸어서 다른 인형뽑기 브랜치로 갔다. 그러자 거기에는 굿즈가 잔뜩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아이 아빠의 시도 2차에 그놈의 인형뽑기 집게에 누가 본드라도 붙여 놨는지 아이가 원하는 커다란 쿠션에 딱 붙더니만 놓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끝까지 연인마냥 끌어안고 있다가 구멍에 탁 떨어뜨려주는 것이 아닌가? 어제는 20트도 안 되었는데 오늘은 시도한 지 2트만에 커다란 쿠션을 뽑게 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걸로 항공비 호텔비 어제 게임비까지 다 번 셈이었다. 도쿄신미술관이고, 충견 하치 박제한 박물관이고, 몬자야끼고 하브스 케이크고 뭐고 다 필요없었다. 아이는 매우 행복했고 우리도 그러했다.
그래도 인형뽑기 중독은 위험하다! 앞으로 출입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