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의 인도네시아 생활은 처음부터 3년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정해진 시간이 있었고, 그 안에서 영어 공부의 효과를 최대한 끌어내고 싶은 내 욕심이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돈이었다.
돈이 충분했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가장 비싼 국제학교로 보내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평범한 K 온라인 게임인 부부였고, 외벌이로 감당하기엔 국제학교 학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학교 선택을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맘카페를 뒤져봐도 나와 같은 선택을 고민한 사람, 혹은 이미 그 길을 지나온 후기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이건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부부가 바카라임져야 할 결정이었다.
내셔널 플러스 학교에서의 첫 1년은 ‘영어를 배우는 시간’이라고들 했다. 듣기는 가능하지만 말은 잘 나오지 않는 기간이 꽤 길고, 보통 최소 6개월은 지나야 아이들이 영어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고 했다.
실제로 1학기를 보내고 나니 캐서린도 영어 듣기가 훨씬 편해졌고,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말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때부터 나는 생각했다.
아, 이제 국제학교로 옮길 타이밍이 다가오고 있구나.
즐거운 겨울방학을 보내고 다시 시작된 4학년 2학기,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한국에서 오랜만에 친구들도 만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서인지 요즘은 인도네시아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눈치다.
3년은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해야지 싶다가도, 이제 정확히 2년 반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너를 위한 선택이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딸아이는 아마 “나는 가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라고 말하겠지.
그럼 이건 내 욕심일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딸의 마음을 최대한 헤아리며 여기서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다. 하고 싶다는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들어주면서, 이곳에서의 시간을 덜 힘들게 만드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방학 한 달 동안 한국에 머무느라 영어 공부를 거의 하지 못해 걱정했지만, 도착 후 일주일 정도는 버벅거리더니 빠르게 다시 영어 모드로 전환했고 지금은 다시 잘 다니고 있는 듯하다.
한 달 살기 영어캠프로 온 한국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캐서린에게 잘 부탁한다고 맡겼다고 한다.
캐서린도 아직 영어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친구의 통역을 맡으면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다 보니 영어 사용량이 확 늘었고, 그 덕분인지 영어 실력이 갑자기 쑥 느는 것 같다고 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도움을 받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누군가를 돕는 아이가 되었다.
그 경험이 아이에게 꽤 큰 자존감을 안겨준 것 같아 그 부분은 참 다행이다.
내가 느낀 내셔널 플러스 학교의 환경은 이랬다.
인도네시아 학생 비율이 높았고, 인도네시아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있었으며, 인도네시아 교육과정 안에 포함된 필수 과목들이 존재했다. 원어민 선생님보다는 인도네시안 선생님이 중심이 되는 구조였다.
처음에는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영어 환경이 약해지는 건 아닐까?
하지만 곧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 아이들에게도 영어는 제2외국어였다. 모두가 완벽하지 않았고, 자주 틀렸고, 다시 묻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캐서린은 그 안에서 특별히 느린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같이 멈추고, 같이 고민하고, 같이 다시 말하는 쪽에 가까웠다.
누군가의 유창한 영어를 듣기만 하는 환경이 아니라, 서로 맞춰가며 대화하는 환경.
“다시 말해줄래?”라고 물으면 친구들이 요리조리 쉽게 설명해 주고, 설명하다가도 “이 단어는 알아?” 하고 확인해 주고, 틀려도 괜찮다는 분위기. 끝까지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태도, 이해하려고 되묻는 반응들.
캐서린은 그 안에서 ‘맞게 말하는 법’보다 ‘끝까지 말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더 이상 말을 망설이지 않았고, 수업 참여도 자연스러워졌다.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서인지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학기와 달리 종교 수업이나 바하사 인도네시아어 수업에서는 영어 설명 없이 인도네시아어로만 수업이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영어를 잘하는 러시아 학생이 왜 영어로 설명해 주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바하사 인도네시아어 수업이기 때문”이라는 답만 돌아왔고, 결국 인도네시아 학생들을 제외한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셔널 플러스는 100% 영어 수업이 아니다.
3년이라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처음 1년은 현지 적응도 하고 가성비 있는 선택을 했지만, 요즘 들어 아이의 발음이 점점 인도네시아식으로 변해가는 게 느껴진다.
발음이 조금씩 인도네시아식 영어로 변하는 느낌. 콩글리시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선생님들은 친절했지만, 언어를 계속 다듬어 주는 환경은 아니었다. 대화를 이어가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표현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수업의 일부가 인도네시아어로 진행되는 비율이 점점 늘어났다. 처음에는 영어로 가르치던 인도네시아 과목도 학기가 바뀌고 선생님이 바뀌면서 인도네시아어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외국인 학생들이 항의했지만 크게 달라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캐서린은 그 시간에 그림을 그리거나 다른 걸 하며 사실상 수업에서 빠져 있었다.
그때부터 영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고민했다.
이제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했고, 일상생활 영어를 이해하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큰 어려움도 없어 보였다면—지금이 바로 국제학교로 옮길 시기가 아닐까.
내셔널 플러스에서 국제학교로 옮기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현재 다니는 학교에서 다음 학기에도 계속 다닐 예정인지 묻는 수요 조사 문자가 왔다. 나는 영어 환경 부족이라는 말은 쓰지 않고, 이사로 인해 학교를 옮기게 되어 다음 학기에는 함께하지 못할 것 같다고 답했다.
솔직하게 적지 못한 이유는 혹시라도 학생 기록부에 좋지 않게 남을까 봐서다. 이런 순간에 나는 늘 소심해지는 엄마다.
아이 역시 새로운 학교로 가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 보였다. 이제 막 지금의 친구들과 친해졌는데, 또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아이에게도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설득했다.
이곳에 와서 한 곳에만 머무르기보다는 여러 곳에서 살아보는 경험이, 그리고 영원히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다양한 환경을 겪어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아이와 함께 국제학교 투어를 시작했다. 상담을 받고, 아이의 의견을 묻고, 학비와 집에서의 거리까지 하나하나 따져 보았다.
아이는 지금까지 가본 학교들 중에서 그곳이 제일 마음에 든다고 했다.
전체 학생 수 중 한국인은 두 명뿐이라는 말을 듣고, 아이 학년에는 한국인이 있는지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한국인이 왜 없을까.
그래서인지 이 학교에 대한 정보는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정보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끌리는 선택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인 학부모가 있으면 정보를 얻기에는 훨씬 편하겠지만, 우리는 어차피 앞으로 2년만 더 있다가 돌아갈 예정이다.
아무 정보도 없는 곳이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는 생각으로 이번 결정만큼은 나와 아이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입학시험을 치르러 갔다.
입학시험은 학교에서 정해준 날짜에 직접 학교로 찾아가 치렀다. 아이는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컴퓨터 앞에 앉아 문제를 풀어야 했다.
작년 7월, 내셔널 플러스 학교 입학 테스트를 볼 때는 온라인으로 진행됐고, 그때만 해도 아이는 영어 글을 거의 읽지 못해 옆에서 도와주거나 번역기를 사용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 방에 들어가 수학과 리딩 테스트를 스스로 풀었다.
인터뷰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테스트만 치른 뒤 학교 투어를 하고 끝이었다.
결과는 일주일 뒤에 알려준다고 했다. 입학 테스트 결과와 함께 제출한 아이의 성적표를 종합해 본다고 했다.
지금 우리는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이 선택이 정답일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그때의 우리는, 아이의 속도와 우리 집의 현실을 함께 고려해 최선이라고 믿는 방향으로 한 걸음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