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도 친구 되는 이곳의 결정적 매력

북한산 의상능선 산행, 자연 앞에서 작아지고, 마음은 넓어지는 가을 산행

by김남정

올해는 두 딸이 결혼하고 처음 맞는 추석이다. 예전 같으면 명절 음식 준비로 분주했겠지만, 올해는 조금 달랐다. 양가 모두 차례를 지내지 않고, 딸들은 각자의 시댁으로 갔다. 딸들이 떠난 집에는 우리 부부만 남았다. 분주함 대신 한가로움이 찾아온 추석 전날이었다.



아침부터 딸에게 카톡이 왔다.



"엄마 아빠, 오늘 뭐 하실 거예요?"

"응, 우린 북한산 가는 중이야."


잠시 후 답이 왔다.


"엥? 또 산에 가요?"


웃음이 났다. 주말에도 산에 다녀왔으니 그럴 만했다. 처음 산에 오르기 시작한 지도 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때의 나는 정상에 도착해야 산행이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중간에 돌아서면 실패한 것 같았고, 가파른 길을 만날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것 같아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산에 오르는 날이면 설렘보다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산행의 의미가 반드시 정상에 도착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힘들면 잠시 숨을 고르고, 내 몸의 속도에 맞춰 한 걸음씩 걸으면 된다. 정상에 닿기 위해 걸었던 모든 시간이 결국 산행이었고, 그 길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 그리고 내 마음의 변화가 오래 남았다.



바위 앞에서는 오롯이 나에게 집중한다



그날 우리가 선택한 길은 북한산 의상능선이다. 의상봉에서 시작해 가사당암문을 지나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다.


image.png▲의상능선 구간암벽과 쇠줄을 잡고 올라가면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능선입니다.


의상능선은 만만한 길이 아니다. 흙길을 걷다가도 어느 순간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암릉을 오를 때는 쇠줄을 두 손으로 잡고 발을 디딜 곳을 찾아야 한다. 한쪽 발을 바위에 올리고 몸을 끌어당긴다. 다음 발을 내딛기 전에 손으로 잡을 곳부터 살핀다. 때로는 바위에 몸을 낮추고 네 발로 기어가듯 올라가기도 한다. 숨이 가빠지고 땀이 온몸을 적신다.



그런데 힘들수록 다른 생각은 사라진다. 지금 발을 어디에 놓을지, 손은 어디를 잡을지, 몸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지에만 집중한다. 일상에서는 지나간 일을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일을 걱정하며 마음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지지만, 바위 앞에서는 그럴 틈이 없다. 산이 나에게 주는 뜻밖의 선물은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잠시라도 지금의 나에게 온전히 머물게 하는 것.



산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친구다



능선을 걷다 보면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산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도 친구가 된다. 내려오는 사람이 "안녕하세요"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넨다. 좁은 길에서는 서로 길을 양보하고, 바위 구간에서는 앞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준다.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조금만 더 가시면 돼요"라는 말도 건넨다.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휴대전화를 받아 든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사진을 찍어주고 나면 이번에는 내가 부탁한다.



"저도 한 장 부탁드릴게요."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다시 만날 가능성도 높지 않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만큼은 우리는 친구다. 산에서는 사람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 모두 사라진다. 나이도 직업도 사는 곳도 중요하지 않다.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



생각해 보면 삶에서 필요한 관계도 꼭 복잡한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 먼저 인사를 건네고, 힘든 사람을 잠시 기다려주고, 사진 한 장을 찍어주는 것. 사람 사이의 따뜻함은 어쩌면 그런 작은 행동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산 앞에서 떠오른 한 문장


image.png▲용출봉 정상 표지석용출봉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능선. 거대한 바위 봉우리와 솜털구름 그리고 짙은 초록의 숲이 어우러진 풍경입니다


용출봉에 올라서자 거대한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솜털 같은 구름이 푸른 하늘에 퍼져 있고, 능선을 걷는 사람들의 다정한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저마다 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어느새 산은 거대한 배경이 되고, 그 앞에 선 사람들은 모두 주인공이 된다. 땀을 흘리며 올라왔지만 시원한 가을바람이 금세 땀을 말려주었다.



"참 좋다."



나무와 바람과 가을 햇살 앞에서는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용혈봉에 올라 백운대를 마주했을 때는 감탄보다 먼저 작은 두려움이 들었다. 멀리서 바라볼 때와 달리 거대한 바위 봉우리가 눈앞에 떡 버티고 있었다.



그 순간 요즘 다시 읽고 있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서 읽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자연 앞에 서 있으면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알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작아진 만큼 마음은 더 넓어진다."


산 앞에 서니 그 말이 왜 오래 기억에 남았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은 일상에서 자신이 가진 걱정과 계획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갈 때가 많다. 하지만 수억 년의 시간을 품은 듯한 바위와 끝없이 이어지는 산자락 앞에 서면 내가 가진 고민이 아주 작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내가 초라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넓어진다. 내가 가진 걱정 하나에만 매달렸던 시선이 주변으로 조금씩 퍼진다. 오늘 함께 걷는 사람을 바라보고, 나무를 보고, 하늘을 보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작아지는 것이 꼭 작아지는 것만은 아니었다.


가을은 천천히 산을 바꾸고 있었다


image.png▲증취봉초록 숲 사이로 붉게 물든 단풍잎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 아래로 펼쳐진 숲은 여전히 초록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곳곳에서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초록 잎 사이로 노란빛과 붉은빛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산길의 숲은 올라올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오르막에서는 발끝과 숨소리에 집중했다면, 내려갈 때는 주변의 나무와 숲을 천천히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



'단풍이 제대로 들면 다시 와야겠다.'



가을 산은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 오늘의 초록과 며칠 뒤의 노랑, 그다음의 붉은빛이 모두 다른 풍경일 테니까. 바카라도 그렇다. 같은 바카라을 다시 읽어도 예전에는 지나쳤던 문장이 어느 날 마음에 걸릴 때가 있다. 바카라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진 것이다.



산행도 마찬가지다. 십 년 전의 나는 정상에 닿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길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달라지는 내 마음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정상에 도착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



산을 오르며 사람을 만나고, 바위 앞에서 숨을 고르고,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바라본다. 때로는 바카라 속 문장을 떠올리고, 그 문장이 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삶도 산행도 꼭 가장 높은 곳에 도착해야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그 길에서 무엇을 만났는지 기억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소로의 문장처럼 자연 앞에서 내가 작아지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은 더 넓어진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산에 오를 것이다. 초록이 단풍으로 물드는 날 다시 이 길을 걸으며, 오늘 보지 못했던 또 다른 풍경과 또 다른 마음을 만나고 싶다.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삶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보기 위해서 다음 산행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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