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선 '추석 때 할 일' 대신 이 생각만 합니다

평범한 김밥도 꿀맛 같은 시간, 내 속도대로 걸으며 만나는 작은 풍경들

by김남정

산행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하늘은 맑고 피부에 닿는 바람결은 나의 마음을 자꾸만 밖으로 내몬다.


지난 20일 일요일, 남편과 북한산으로 가을 산행을 나섰다.


"오늘은 숨은 벽 코스로 갈까?"


내 제안에 남편은 주차가 곤란할 거라고 했다. 남편의 예상대로 밤골공원지킴터는 주차가 어려웠다. 우리는 주차 공간이 넉넉한 송추 제2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가을 산을 기다렸다는 듯 등산객들이 많았다.


오봉 탐방지원센터에 이르자 탐방객의 안전한 산행을 돕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안전 장비 무료 대여 안내와 함께 심폐소생술을 직접 배워보는 자리였다. 교육용 마네킹을 앞에 두고 가슴압박을 체험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산에 오르기 전, 혹시 모를 위급한 순간에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산을 잘 오른다는 것은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의 안전까지 살피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나도 간단히 안전을 살핀 뒤 산길로 들어섰다.


image.png▲북한산 탐방객 안전교육 현장북한산국립공원에서 탐방객을 위한 안전장비 무료 대여와 심폐소생술(CPR)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발밑에 떨어진 밤 한 알



산 아래 나무들은 벌써 조금씩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여성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툭!"


자그마한 밤 한 알이 내 발밑으로 떨어졌다. 뜻밖의 선물 같았다.


'오늘 산행, 기분 좋게 시작하네.'


길에는 벌어진 밤송이와 도토리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마른 낙엽 사이로 풍겨오는 냄새도 좋았다. 아직 산 전체가 단풍으로 물들지는 않았지만, 여름을 지나온 나무들의 잎은 조금씩 다른 빛깔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image.png▲숲이 준 선물낙엽이 쌓인 숲길 곳곳에 떨어진 밤과 밤송이 그리고 도토리입니다.


여성봉으로 가는 길은 돌계단과 나무계단, 암릉 구간이 이어졌다.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조금 오르자 벌써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의 표정이 달랐다. 어떤 사람은 힘이 넘쳐 보였고, 어떤 사람은 숨이 차서인지 얼굴에 고단함이 묻어났다. 같은 산길을 걷는데 사람마다 걸음의 속도와 표정이 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사람의 삶을 생각했다.



누군가는 지금 힘차게 자신의 길을 올라가고 있고, 누군가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미 지나온 길을 돌아 내려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삶도 산길과 비슷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같은 길을 걷더라도 몸의 상태와 마음의 무게는 다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속도를 보며 내 걸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걸어야 할 길은 결국 내 발로 걸어야 하니까.



돌계단을 한 발씩 오르던 중 오래전 읽었던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에서 만난 문장이 떠올랐다.



"마음은 일종의 풍경이며, 걷기는 그 풍경을 지나가는 방법이다."
-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중>


그 문장을 떠올리고 나니 지금 걷고 있는 산길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나는 산을 걷고 있지만, 어쩌면 동시에 내 마음속을 걷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초가을 산이 내게 준 것



사계절 산을 오르다 보면 계절마다 마음을 붙잡는 풍경이 다르다. 봄이면 파릇한 새잎과 봄꽃에 마음을 빼앗기고, 여름이면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깊은 가을에는 울긋불긋 물든 단풍에 눈길이 머물고, 겨울에는 눈 덮인 산의 고요함에 마음을 빼앗긴다.



이맘때의 산은 조금 다르다. 아직 단풍으로 온 산이 물들기 전이라서일까. 오히려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것들이 하나둘 들어온다. 발밑의 밤 하나,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 바람에 흔들리는 잎, 바싹 마른 낙엽에서 올라오는 냄새.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름 모를 가을 곤충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이다.


며칠 후면 추석이다. 차례를 지내지는 않지만, 아이들과 함께 먹을 음식도 준비해야 하고, 집안일이며 미뤄둔 일들도 자꾸 머릿속에 떠오른다. 한 가지 일을 하면서도 다른 일을 생각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그런데 산길에서는 달랐다.


눈앞에 밤송이가 보이면 걸음을 늦춰 바라보고,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면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내 발이 어디에 닿는지, 숨은 얼마나 차오르는지, 저 나무의 잎은 어제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했다. 걷는 동안만큼은 눈앞의 한 가지에 온전히 마음을 둘 수 있었다.


내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image.png▲암릉과 나무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여성봉 오봉 가는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여성봉에 가까워질수록 숲 사이로 하늘이 넓어졌다. 여성봉 아래쪽 커다란 암벽에 올라 멀리 보이는 오봉을 사진에 담고 한참 바라보았다. 산 아래서부터 함께 올라온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힘들다고 느꼈던 오르막도 위에서 바라보니 어느새 지나온 길이 되어 있었다. 힘들 때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도 지나고 나면 한 구간의 길이 되어 있었다.


여성봉을 지나 오봉으로 향했다. 능선을 따라 걸으니 올라오는 동안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산은 그대로인데 내가 걷는 위치가 달라지자 풍경도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능선이 나타나고, 지나온 길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가을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깊숙이 내려앉았다. 아직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이 만든 그늘에 자리를 잡고 김밥 한 줄을 꺼냈다.


산에서 먹는 김밥은 왜 이렇게 맛있는지 모르겠다. 특별한 음식도 아닌데 충분히 걸은 뒤라 그런지 한 줄이 금세 없어졌다. 김밥을 다 먹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것 아닌 한 끼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참 잘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image.png▲여성봉 암벽에서 본 풍경산에 오를 때마다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오봉을 지나 송추계곡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갈 때와 또 달랐다. 올라갈 때는 목적지가 마음을 끌어당겼다면, 내려갈 때는 주변을 천천히 바라보게 됐다.


단풍나무가 빽빽한 좁은 산길을 따라 걷는데 이름 모를 가을벌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늦추고 귀를 기울이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여름 내내 힘차게 흐르던 계곡물은 많이 줄어 있었다. 그래도 물이 조금 남아 있는 곳에서는 작은 버들치들이 한가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이 많지 않은 곳에서도 살아가는 작은 물고기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풍족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제게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산을 내려오면서 문득 생각했다.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늘 모든 것이 충분할 수는 없다. 어떤 날에는 숨이 차고, 어떤 날에는 걸음을 늦춰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지금 내게 주어진 길을 바라보며 다시 걸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산을 내려오며 알게 된 것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침에 발밑으로 툭 떨어졌던 밤 한 알이 생각났다.


처음에는 그저 산길에서 우연히 만난 작은 밤이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그 밤 하나가 나로 하여금 주변을 조금 더 자세히 바라보게 했던 것 같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밤송이와 낙엽,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이름 모를 벌레 소리까지.


바카라 <걷기의 인문학>을 다시 생각했다. 걷기는 어쩌면 어디론가 가기 위한 행위이면서 동시에 내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산길에서 나는 내 마음의 풍경을 천천히 지나왔다. 때로는 숨이 찼고, 때로는 힘이 들었다. 하지만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법 멀리 와 있었다.

삶도 그럴 것이다. 무엇인가를 단숨에 뛰어넘는 것보다, 오늘의 길을 내 속도로 걷는 것. 힘들 때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걸어가는 것. 그리고 걷는 동안 만나는 작은 풍경들을 놓치지 않는 것.


초가을 북한산에서 돌아오는 길, 어쩌면 삶에도 그렇게 발밑에 툭 떨어지는 작은 순간들이 있는 것인지 모른다.


image.png▲한가롭게 헤엄치는 버들치들 송추계곡의 버들치 모습과 조금씩 물든 나뭇잎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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