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못 갈 줄 알았는데 2년 반 만에 오른 산

다시 시작한 부부의 산행, 강화 혈구산과 고려산에서 찾은 희망

by김남정

지난 4일, 비가 지나간 다음 날이었다.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공기에는 흙냄새와 연둣빛 나뭇잎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이런 날은 산공기가 유난히 그리워진다.


사실 우리 부부는 한때 꽤 열심히 산을 다녔다. 십 년 넘게 한 달에 두세 번 북한산을 비롯 유명산 들을 올랐다. 계절마다 산의 모습이 달라지는 걸 몸으로 느끼는 걸 좋아했고, 정상에서 먹는 김밥과 보온병 커피를 나눠 마시는 시간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등산은 우리 삶에서 멀어졌다.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10월 남편의 아킬레스건 수술이었다. 수술을 할까 말까 고민했던 시간이 꽤 길었지만 우리는 수술을 결정했다. 수술 뒤 한동안은 걷기도 조심스러웠다. 오래 걷고 나면 발목이 붓기도 했고 밤이면 수술 부위가 전기가 흐르듯 찌릿거리기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우리는 어쩌면 다시는 함께 산에 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월 연휴를 앞둔 어느 날 늘 계획형인 남편이 툭 던지듯 말했다.



"우리 오월 연휴에 등산 갈까?"



뜻밖의 말에 나는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다.



"괜찮겠어?"



하지만 남편의 "괜찮아"라는 짧은 대답에는 단단한 확신이 담겨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알고 보니 남편은 재활을 시작한 뒤부터 헬스장에서 운동 강도를 올리고 조금씩 뛰기도 했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이른 봄부터 나와 일주일에 한 번 동네 뒷산을 오르고 한강 산바카라을 하며 자신의 몸 상태를 조금씩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남편이 다시 산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래 잊고 있었던 등산화, 다시는 메지 않을 것 같던 배낭, 신발장 한편에 잘 보관해 둔 등산지팡이까지 되살아 났다. 다음을 생각하며 깨끗이 닦아서 보물처럼 보관해 온 것들이 제 쓰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간단한 간식과 삶은 달걀, 커피를 챙겨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산행에 나섰다.


목적지는 강화도의 혈구산이었다. 혈구산은 인천 강화군 내가면과 양도면 일대에 자리한 해발 466미터의 산이다. 강화도의 산 가운데서도 비교적 완만한 편이라 초보자나 오랜만에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적다. 정상에 오르면 강화 앞바다와 크고 작은 섬들이 한눈에 펼쳐져 전망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우리는 처음부터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늘 가던 북한산은 그대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누군가 했던 "산은 늘 거기에 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중요한 건 얼마나 높은 산을 오르느냐보다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내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꺼낸 등산화와 배낭, 등산지팡이까지 챙겨 들고 나서니 출발 전부터 기분이 들떴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기분 좋게 달렸다. 주차 공간이 좁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연휴임에도 고비고개에는 열 대 정도 주차할 공간이 남아 있었다. 주차를 하고 등산 장비를 재정비하여 한 발을 내 디뎠다.


비 온 다음 날의 산길은 촉촉했다. 흙냄새가 진하게 올라왔고, 오솔길 양옆으로 초록빛 잎들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햇살은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져 내렸다. 하늘은 믿기지 않을 만큼 맑았다.



"공기 좋다."



우리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기분 좋게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길을 올랐다.


image.png▲오월의 산강화도 혈구산과 고려산 등산을 하며 본 풍경들입니다. ⓒ 김남정


처음엔 평탄한 길이 이어져 안심하던 순간, 놓은 지 얼마 안 되는 계단이 떡! 하니 우리 앞에 버티고 있었다. 페인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계단에는 누군가 320 계단이라고 친절하게 써 놓았다. 그래도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올랐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계단 끝에 또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숨이 슬슬 차오르기 시작했다. 운동은 꾸준히 해 왔지만, 오랜만의 산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괜히 남편 눈치를 봤다. 내가 먼저 힘들다고 하면 오랜만의 산행 분위기를 망칠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남편은 성큼성큼 잘도 올라갔다. 수술 직후 절뚝이며 걷던 모습을 지켜봤던 터라 그 뒷모습이 낯설 만큼 든든했다. 힘든 와중에도 "정말 많이 회복됐구나" 싶어 감사함과 안도감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기분은 좋았지만 나는 너무 힘들었다. '왜 이렇게 체력이 떨어졌지' 싶어 속으로 자존심도 조금 상했다.



그렇게 도착한 혈구산 정상 의자에서 먹은 삶은 달걀과 따뜻한 커피 맛은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정상석 뒤로 펼쳐진 강화의 산과 바다, 섬들이 봄빛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맑게 갠 하늘 아래 서 있으니 지난 시간의 걱정과 불안도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훨씬 쉬웠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발걸음도 가벼웠다. 그런데 하산길 끝에서 고려산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를 발견했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려산까지 갈까?"



결국 아쉬움을 못 참고 다시 걸었다. 강화도 고려산은 봄이면 진달래 군락으로 유명한 산이다. 해발 436미터로 비교적 높지 않지만, 정상 부근까지 이어지는 넓은 능선과 탁 트인 풍경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특히 4월이면 산 전체가 분홍빛 진달래로 물든다. 우리가 찾은 오월의 고려산에는 진달래는 없었지만 대신 산은 초록으로 가득했다.


image.png▲고려산 등산길에서 만난 풍경소나무 숲과 청설모가 인상적이었습니다. ⓒ 김남정

구름다리를 지나 이어진 숲길에는 소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는데, 걷다 보니 문득 독일 여행 때 보았던 흑림을 연상시키는 풍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에서 청설모 한 마리가 나무를 타고 오르내리는 모습도 만났다. 작은 몸으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꼭 우리를 환영해 주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사진에 담아 딸들에게도 전송했다.



생각해 보면 이번 산행은 단순한 등산이 아니었다. '다시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을 넘어서는 시간이었다. 수술 이후 조심스럽게 몸을 회복해 온 남편에게도, 옆에서 불안해하던 나에게도 늘 아빠의 안전을 염려하는 딸들에게도 이번 산행은 작은 확인 같은 것이었다.



물론 다음 날은 우리 둘 다 근육통으로 꽤 힘들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끙끙 앓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기분은 좋았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우리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다시 사계절의 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도 다시, 천천히 그 길 위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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