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따스한 숨결이 닿을 때마다 내 마음은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가끔은 우리가 만나기로 계획했던 사람이 아니라, 단 한 번도 만날 거라고 상상해 본 적 없는 사람과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저녁을 보내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일과 여행, 방콕, 그리고 서로가 좋아하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업무에 관한 이야기였다.
타나팟 씨는 내가 참석했던 비즈니스 서밋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대화의 주제가 조금씩 달라졌다.
나는 그가 생각보다 훨씬 편안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서밋에서 그는 무척 진지해 보였다.
말수가 적었고, 누군가 이야기할 때면 쉽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것은 그가 내 말을 끝까지 듣는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하는 사람처럼.
"아름 씨는 여행을 자주 다니시나 봐요."
"일 때문에요. 사실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죠."
"새로운 도시에 가도 대부분 호텔이랑 회의장밖에 못 보거든요."
그가 작게 웃었다.
"그럼 방콕도 그렇게 기억되겠네요."
"아마도요."
"조금 아쉽네요."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요?"
나는 웃었다.
타나팟 씨는 , 지금 방콕 관광 홍보대사처럼 말씀하고 계세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들렸나요?"
"조금요."
그는 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는 좀 더 자연스럽게 추천해 드려야겠네요."
잠시 후 그가 물었다.
"그런데 아름 씨는 보통 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계시는 편인가요?"
"아니요. 오히려 반대예요."
"그럼 오늘은 특별한 날인가 보네요."
그는 더 묻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오히려 편안했다.
상대방의 모든 대답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는 사람.
그러다 대화가 잠시 끊겼을 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름 씨,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어떤 질문인데요?"
"지금 만나고 있는 분이 있으세요?"
나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왜요?"
그가 잠시 웃었다.
"불편하시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것도 비즈니스 서밋에서 하는 질문인가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요. 이건 확실히 개인적인 질문이네요."
나는 물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렸다.
"어려운 질문이었나요?"
"조금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상하게도 그가 질문을 멈추자 오히려 내가 말을 이어가고 싶어졌다.
"가끔은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있잖아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타나팟 씨는 그런 적 없으세요?"
그는 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흐르는 강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항상 명확한 건 아니니까요."
우리 사이에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저녁 식사가 끝났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져 있었다.
우리가 레스토랑 밖으로 나오자마자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Oh no!"
나는 당황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타나팟 씨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방콕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지금 웃으시는 거예요?"
"조금요."
"정말 너무하시네요."
"미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나는 결국 따라 웃고 말았다.
비는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어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빨리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그의 코트 한 벌에 의지한 채 쏟아지는 비를 피해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은 코트 하나로 두 사람을 비로부터 지켜내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깨는 어느새 빗물에 젖어 있었고, 우리의 발걸음은 자꾸만 엉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비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함 때문이었을까.
차가운 빗방울이 쏟아지는 그 순간에도, 내 마음만은 봄날처럼 따뜻했다.
어쩌면 그날 내가 피하고 싶지 않았던 건 비가 아니라, 그와 함께하는 그 짧은 순간이 끝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호텔의 지붕이 있는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비가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은 빗방울 너머로 흐릿하게 번졌다.
근처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난간 가까이에 서서 비 내리는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물었다.
"방콕의 첫인상은 어떠세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그리고요?"
"아름다워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웃었다.
"여기 사시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조금 의외네요."
"오래 살았다고 해서 모든 풍경이 익숙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다시 도시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와 함께하는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빗소리를 조금 더 오래 듣고 싶어졌다.
잠시 후 그가 물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 원래 다른 일정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운전기사가 기다리고 있어서 일찍 가셔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런데 나중에는 기사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하셨죠."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그걸 기억하고 계셨어요?"
"우연히요."
나는 작게 웃었다.
"그렇군요."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왜 더 안 물어보세요?"
"물어봐도 되나요?"
그의 대답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조심스러우시네요."
"그런 편입니다."
"서밋에서는 전혀 그렇게 안 보이셨는데요."
"그때는 일하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은요?"
그는 내 질문에 살짝 미소 지었다.
"지금은 그냥 저녁을 보내고 있죠."
이렇게 말하며 나는 다시 비 내리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요."
비는 서서히 그치기 시작했다.
타나팟 씨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혹시 피곤하지 않으세요?"
"조금요.
"그럼, 가기 전에 한 곳만 더 보여드려도 될까요?
"어디요?"
"루프톱이요."
"네. 날씨가 좋으면 방콕이 아주 잘 보이죠."
"지금은 비가 오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어요."
나는 잠시 고민했다.
시간은 이미 늦었다.
원래라면 호텔로 돌아가 쉬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좋아요. 잠깐만요."
그가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시원한 밤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비는 거의 그쳐 있었다.
먼 하늘에는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Wow... It's beautiful.”
그때 타나팟 씨가 내 곁으로 다가와 섰다.
“Yes, it is.”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는 도시의 야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타나팟 씨는 원래 사람을 그렇게 바라보세요?”
그가 물었다.
“어떻게요?”
“마치 상대방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요.”
그가 미소 지었다.
“그럼 아르음 제가 아르음 씨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세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조차 내 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후, 어디선가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와 춤추시겠어요?”
“하지만 저 춤출 줄 모르는데요.”
“한번 해봐요.”
나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려놓았다.
우리는 잔잔한 음악에 맞춰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멈췄다.
내 시선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사람과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음 ?
“음?”
“혹시 제가 불편하게 하고 있나요?”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오늘 밤이 이렇게 빨리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오늘 밤을 아직 끝내지 말아요.”
나는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도 될까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고, 우리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내 심장은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아르음 씨, 괜찮아요?”
“네….
이 말을 할 때 내 목소리는 떨렸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는 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그의 코트 소매를 꽉 붙잡았다. 아마도 그는 내 마음 상태를 알아챈 것 같았다.
그 차갑고 눈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마치 뜨거운 사막처럼 불타오르는 듯했다.
그가 나를 자신의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의 따스한 숨결이 닿을 때마다 내 마음은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새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늦었네요."
내 말에 그도 시계를 보았다.
"그러네요."
"타나팟 씨."
"네?"
"오늘 저녁에 제가 이렇게 오래 있을 줄 아셨어요?"
그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요."
"정말요?"
"솔직히 저녁 식사만 하고 돌아가실 줄 알았습니다."
나는 웃었다.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타나팟 씨가 나를 위해 택시를 불러주었다.
우리는 호텔 입구에서 차를 기다렸다.
비가 그친 뒤의 공기는 조금 서늘했다.
그가 물었다.
"내일도 일정이 있으세요?"
"네. 오전부터요."
"그럼 오늘 너무 늦게까지 붙잡아 둔 것 같네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는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잠시 후 택시가 도착했다.
나는 차 문을 열기 전에 그를 돌아보았다.
"오늘 저녁 감사했어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다웠어요."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곧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름 씨."
나는 돌아보았다.
"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혹시... 방콕에 계시는 동안 시간이 되시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잠깐 멈췄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조용하고 차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표정이 조금 달라 보였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아마도요."
그가 웃었다.
"그 단어를 정말 좋아하시네요."
"어떤 단어요?"
"'아마도'요."
나는 웃었다.
"인생의 모든 질문에 당장 답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택시에 올라탔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타나팟 씨는 여전히 호텔 입구에 서 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