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편리함은 누구의 어깨 위에 서 있나
월말이면 카드 명세서를 훑는다. 월세, 전기, 인터넷, 보험. 대부분 지울 수 없는 것들이라 자동이체가 되어 있다. 매번 비슷한 항목들이다.
그런데 익숙한 항목들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낯선 항목 하나가 끼어들었다. AI 구독료. 그 숫자는 어느새 공과금 사이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매달 약정된 금액으로 나가는 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항목을 명세서에서 지울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아닐 것 같았다. 인터넷이 없으면 한 시간도 버티기 어렵게 된 것처럼, 이제는 이 도구가 없으면 개인적인 일뿐 아니라 회사 업무에도 막대한 지장이 생긴다. 내가 퇴직을 한들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지구에서 살아 있는 동안 매달 꼬박꼬박 내야 하는 돈. 지구에 거주하는 댓가로 내는 월세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물론 편리해진 건 사실이다. 내가 사용하던 계약서 샘플을 여러 개 주고 새 계약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주면, 몇 초 만에 매끈한 문장이 돌아온다.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고 처음부터 검토를 다시 해야 하지만, 시간이 크게 절약된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막히던 번역도, 정리되지 않던 메모도 이내 모양을 갖춘다. 나는 그 편리에 값을 치른다. 다만 명세서에 찍힌 그 숫자가 이 편리의 값 전부는 아니었다.
레오 14세 교황이 발표한 회칙 「위대한 인간성」(Magnifica Humanitas)을 읽으면서 떠오른 두 번째 문제가 이것이다. 디지털 경제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 위에 서 있다는 것. 어쩌면 조금 과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칙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 보니, 그 말은 은유가 아니었다.
첫째, 이 월세를 받는 집주인은 전 세계적으로 극소수다. 인터넷도 전기도 보통은 각자가 사는 지역, 사는 나라에서 서비스를 받고 사용료를 낸다. 마을마다, 나라마다 집주인이 다르다. 하지만 AI는 그렇지 않다. 전 세계 사용자에게 월세를 받는 회사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고, 대부분 미국에 있는 그 집주인들에게 전 세계가 매달 월세를 내는 구조다. 모르기는 몰라도 교황청 어딘가에서도 AI를 쓰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월세를 내고 있으리라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이건 어쩌면 조지 오웰이 말한 빅브라더의 출현에 한 발 더 다가선 것일지도 모른다.
둘째, AI의 매끈한 답변 뒤에는 사람이 있다. 전 세계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AI가 내놓은 답을 하나하나 읽고 평가한다. 그중에는 회사가 세상에 보여주고 싶지 않은 종류의 콘텐츠도 있다. 촉박한 기한에 쫓기며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결과물을 종일 들여다보다 정신적 피해를 호소한 노동자도 있었다. 『듀얼 브레인』의 저자는 이 장면을 한 줄로 압축한다.
"윤리적인 AI를 만들기 위해, 기업은 자사 근로자를 윤리적 한계로 몰아붙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배터리에 들어갈 광물을 캐는 흙 속의 아이들이 있고, 데이터센터가 삼키는 막대한 전력과 물이 있다. 회칙이 데이터센터의 에너지와 물 사용을 줄이라고 못 박은 것도 이런 시야에서 출발한 것 아닐까.
그러니 AI의 풍요는 두 방향에서 값이 매겨진다. 아래에서는 누군가의 노동과 광물과 전력이 빨려 들어가고, 위에서는 소수의 기업이 우리 모두에게서 다달이 월세를 걷는다. 편리는 가운데 선 나에게 오지만, 그 편리를 떠받치는 무게도, 그 편리로 불어나는 이익도 대부분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그래서 회칙은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낸다.
누구의 어깨 위에서, 누가 풍요를 누리는가.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AI 문서 한복판에서 교황은 뜬금없이 과거를 사과한다. 노예제가 인간 존엄과 양립할 수 없음을 교회가 온전히 인식하기까지 수 세기가 걸렸다고. 그리고 덧붙인다. 교회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고. 왜 지금 그 사과일까. 답은 바로 다음 문장에 있었다.
그때 우리는 너무 늦었다. 이번에는 늦지 말자는 것이다.
늦지 않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선례가 하나 있기는 하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노예제 폐지 운동에 불을 붙인 것은 법도 칙령도 아니라, 식탁 위의 설탕 그릇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 하얀 결정 뒤에 대서양 건너 농장의 사슬이 있다는 사실을 보기 시작했고, 설탕을 끊었다.
사물과 그 뒤의 사람을 연결해서 본 순간, 세상은 조금 움직였다. 내 카드 명세서의 그 한 줄도, 어쩌면 누군가의 설탕 그릇인지 모른다.
그리고 명세서를 덮으려다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나는 세입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 도구로 절약한 시간은 결국 내 청구서가 되어 의뢰인에게 간다. 그 청구서 안에도 누군가의 노동과 광물과 전력이, 내 이름을 달고 숨어 있는 셈이다. 월세를 내는 손과 월세를 걷는 손이, 알고 보니 한 몸에 붙어 있었다.
우리는 AI를 공중에 떠 있는 마법처럼 다룬다. 버튼 하나면 답이 나오고, 카드에서 월세만 빠져나가면 되는 것처럼. 그러나 모든 AI는 누군가의 노동, 누군가의 광물, 누군가의 전력, 누군가의 물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청구서는 매달 내 명세서에도 조용히 찍힌다.
다음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내 카드 명세서에는 이 월세가 찍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숫자를 볼 때마다 생각이 날 듯하다.
이 편리는 지금 누구의 어깨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내 어깨 위에 올라선 것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