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있다는 만족감에 배불러 하지 마라

그건 잠든 것이다

by신광훈

내가 다니던 회사들은 모두 외국어 학원비를 대 주었다. 영어든 일본어든 중국어든. 직원 복지였고, 자기 계발 지원이었다. 돈이 내 주머니에서 나가지 않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매달 말이 되면 나는 영어 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에 가서 카드로 수강 신청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았다. 등록만으로도 영어가 쑥쑥 늘 것 같았다.


그 기분은 꽤 오래갔다. 수강증이 지갑에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오늘 저녁에는 학원에 가야지, 생각했다. 그 생각만으로도 하루가 조금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저녁은 내 것이 아니었다. 회의가 길어졌다. 회식이 잡혔다. 출장이 생겼다. 하나하나가 다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나는 학원에 가는 날보다 빠지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이상했다. 영어가 느는 것 같았다. 등록을 했으니까. 교재가 가방에 들어 있으니까. 언제든 갈 수 있는 상태였으니까.


일 년이 지났다. 내 영어는 얼마나 늘었을까. 답은 간단했다. 늘지 않았다. 일 년 전의 나와 일년 후의 나는 적어도 영어 실력으로는 거의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억울할 것도 없었다. 사실 학원을 다녔다고 할 수도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일 년 동안 영어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 영어 학원에 등록한 것이었다.


등록만으로는 영어가 늘지 않았다. 영어가 느는 건 그냥 꿈이었다. 매달 초의 그 좋은 기분, 수강증이 주던 든든함,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안심. 그 모든 것이 실은 잠이었다. 나는 일 년 내내 영어가 느는 꿈을 꾸며 자고 있었던 셈이다.


영어뿐일까. 언젠가 바카라을 쓸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언젠가 내 사업을 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을 하는 순간의 표정을 보면 안다. 뿌듯한 얼굴이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절반쯤 이룬 기분이 드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도 그 뿌듯함에 한 몫한다. 나도 그 얼굴을 하고 매달 학원에 등록했다.


꿈이 있다는 만족감은 배가 부르다. 그리고 배가 부르면 잠이 온다. 꿈을 말하는 동안은 편안하다. 아무것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시작하지 않은 일은 실패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등록을 반복한다. 바카라을 사고, 강의를 결제하고, 계획을 세운다. 그것으로 오늘의 할 일을 다 한 기분이 된다.


일 년을 그렇게 잃고 나서, 나는 다르게 다니기 시작했다. 저녁을 굶었다. 회식을 빠졌다. 눈치가 보였고, 배가 고팠다. 매달 초의 그 좋은 기분은 사라지고, 매일 저녁의 피곤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꿈을 꿀 때는 달콤했는데, 꿈을 사는 일은 내내 불편했다.


하지만 늘었다. 영어가 늘기 시작했다. 등록증이 아니라 출석이, 계획이 아니라 굶은 저녁이 영어를 늘게 했다. 그때 경험했다. 꿈과 삶을 가르는 것은 잠에서 깨어나 겪는 불편함, 그것이 전부였다.


지금도 매달 초가 되면 그 시절이 생각난다. 등록 버튼을 누르고 뿌듯해하던 나. 그 뿌듯함이 나를 일 년 동안 재웠다. 꿈이 있다는 만족감에 배불러하지 않을 일이다. 그 포만감이 드는 순간이, 실은 잠드는 순간이다.


오늘도 그 기억이 떠 올라서, 미뤄 두었던 일 하나를 꺼내 바카라상 위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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