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동화] 빨간 우체통 아저씨를 기억하나요?

아날로그의 그리움

by김성수

요즘처럼 손가락 몇 번 움직여 마음을 전하는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그 시절에는 당연했습니다. 수아는 낡은 바카라상 앞에 앉아 정성스레 연필을 깎았습니다. 사각사각, 연필심이 깎여 나갈 때마다 짙은 나무 향기가 방안을 채웠지요.


수아는 하얀 종이 위에 멀리 이사 간 친구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눈을 감으면 선명한데, 종이 위에 옮기려니 자꾸만 삐뚤어지는 선들이 꼭 수아의 서툰 그리움 같았습니다. 꽁꽁 숨겨두었던 고백들—사실은 네가 가고 나서 우리 동네 문방구 떡볶이 맛이 변한 것 같다는 이야기, 네가 빌려준 동화바카라의 마지막 장을 아직 넘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들을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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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다 쓰고 나면 가장 경건한 의식이 남았습니다. 바로 '우표'를 붙이는 일이었지요. 서랍 안쪽 귀한 사탕 깡통에서 꺼낸 꽃무늬 우표. 수아는 풀을 찾는 대신, 혀끝으로 우표 뒷면을 날름 핥았습니다.

톡 쏘는 풀의 쓴맛과 종이 냄새가 섞인 그 기묘한 맛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였습니다. 침이 채 마르기 전, 봉투 오른쪽 구석에 '찰싹!' 하고 우표를 붙이면 비로소 수아의 마음은 여행을 떠날 채비를 마친 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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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선 수아의 눈앞에 펼쳐진 마을은 온통 추억의 색이었습니다. 낮은 담벼락 위로는 분홍색 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골목 어귀에선 동네 할머니들이 평상에 앉아 콩나물을 다듬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요.

구멍가게 앞을 지날 때면 달콤한 눈깔사탕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습니다. 수아는 소중한 편지 봉투가 구겨질세라 두 손으로 꼭 감싼 채,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그분'을 향해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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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끝, 전봇대 옆에 서 있는 우체통 아저씨는 늘 같은 자리에서 마을을 지켰습니다. 여름이면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겨울이면 하얀 눈을 모자처럼 쓰고 서 있던 빨간 키다리.

"아저씨, 이번에도 잘 부탁해요. 꼭 길 잃어버리지 않게 전해줘야 해요!"


수아는 발꿈치를 한껏 들고 우체통의 좁고 긴 입 속으로 편지를 밀어 넣었습니다. '툭' 하고 편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건 아저씨가 편지를 안전하게 받아먹었다는 안심의 신호였습니다.

햇살을 받아서일까요, 아니면 수아가 담아낸 수줍은 진심 때문일까요? 낼름 편지를 받아먹은 우체통 아저씨의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더 붉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무뚝뚝하게 서 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저씨가 수줍게 미소 짓는 것만 같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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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수아는 이제 연필 대신 자판을 두드리고, 우체통 대신 스마트폰 화면을 보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끔 비가 오거나 노을이 유난히 붉은 날이면, 수아는 골목 끝에 서 있던 그 빨간 아저씨를 떠올립니다.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며 우체부 아저씨의 오토바이 소리에 가슴 설레던 그 느릿한 시간들. 그 기다림이 우리를 얼마나 깊게 성장시켰는지 이제는 압니다. 지금은 사라져 보기 힘든 빨간 우체통이지만, 수아의 마음속 골목 끝에는 여전히 수줍게 얼굴을 붉힌 키다리 아저씨가 서 있습니다. 언제든 우리가 진심을 꺼내기만 한다면, 기꺼이 그 마음을 받아먹고 어디든 달려갈 준비를 한 채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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