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아 달라는 말

아이보리빛 누비의 온기

by담서제미

오늘은 잊지 말고 꼭 찾아와야지. 눈을 뜨자마자 다짐부터 했다. 아직 어둑한 방 안에서 그 한마디가 나를 먼저 찾아왔다.


나에게는 애착옷이 있다. 2024년 1월, 이탈리아의 겨울 거리에서 입었던 아이보리 누비 롱코트다. 겨울이 오면 다른 옷은 제쳐 두고 반드시 입어야 할 옷처럼 그 옷에 마음이 간다.


옷장에 새 옷이 걸려 있어도 손은 어느새 그 코트를 향한다. 팔을 내밀면 누비 사이사이에 갇혀 있던 온기가 가만히 나를 안아 준다.


낯선 도시의 돌바닥을 걷던 날의 바람, 골목마다 번지던 커피 향, 그날 내 어깨를 감싸던 부드러운 골이 아직 그 안에 살고 있다. 그 코트를 입는다는 것은 옷을 걸치는 일이 아니라, 좋았던 한 계절이 나를 다시 안아 주는 일이었다.


올해도 봄이 오기 전까지, 여행을 갈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그 옷을 입었다. 그리고 날이 풀리자 집 앞 세탁소에 맡겼다. 맡기면서 아마도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에 찾으러 와야지, 하고. 그 다짐은 세탁소 문을 나서는 순간 가볍게 공기 속으로 흩어졌나 보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동안 나는 그 옷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그 옷이 불현듯 떠올랐다.


며칠 전부터였다. 수영장 가는 길에 문득, 수영 끝나고 오는 길에 찾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속에서 팔을 젓고 숨을 고르다 보면 생각은 물방울처럼 흩어졌다. 젖은 머리를 말리며 돌아오는 길엔 세탁소 앞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다짐은 있었으나 걸음이 따라 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새벽, 눈을 뜨자마자 그 옷이 나를 찾아왔다. 누가 부른 것도 아닌데 아이보리빛 누비의 결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제발 나를 잊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듯이. 처음에는 조금 놀랐고, 곧 가슴이 따뜻해졌다.


몇 달이나 잊힌 채로도 그 옷은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비닐을 덮어쓰고 줄지어 걸린 옷들 사이에서,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올 날을 조용히 기다려 주었을 것이다. 서운함 대신 기다림으로 한 계절을 건너온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나를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그 옷은 이미 충분히 나를 다독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곁에 있을 때는 당연해서 잊고, 멀어지고 나서야 그리워서 떠올리게 된다. 참 고마운 일이다. 잊었다 해도 마음 어딘가에서 기다려 주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


미뤄 둔 안부, 접어 둔 바카라장, 곧 보자고 해 놓고 흘려보낸 얼굴들도 어쩌면 저 코트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사실은 찾으러 가기 딱 좋은 때일 수도 있다. 오늘은 코트를 핑계 삼아, 그 마음들에게도 안부를 물어야겠다.


세수를 하고 커피를 내리면서도 나는 몇 번이나 되뇌었다. 코트, 세탁소, 코트. 주문처럼. 이제 곧 세탁소 문을 밀고 들어가 이름을 말하고, 비닐에 싸인 코트를 건네받을 것이다. 비닐을 벗기면 말간 세제 냄새 사이로 아이보리 누비가 긴 잠에서 깨어나겠지. 나는 그 옷을 두 팔로 꼭 안아 볼 것이다.


기다려 줘서 고맙다고, 많이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해 줄 것이다. 그러고는 소매에 팔을 넣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1월이 어깨 위로 포근히 내려앉고, 올겨울의 첫 바람이 불어와도 하나도 춥지 않을 것이다.


잊지 않으려는 마음, 그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나를 찾아온 것은 한 벌의 코트였지만, 사실은 내가 놓치고 지내던 모든 소중한 것들의 따뜻한 얼굴이었다. 찬바람이 불어서 다행이다. 그 바람이 아니었다면 이 포근한 기다림을 알아채지 못한 채 겨울의 문턱을 넘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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