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던 선배교사가 말했다.
“세인아, 교직생활하면서 한 놈 인생만 구해도 교사 인생 성공이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당장 모의고사 성적을 올리는 데 급급했고, 내 인생도 잘 안 풀리는 20대 교사가 10대들의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었다. 선생님은 나무로 직접 만든 큰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아이들에게 ‘나이스 데이’를 외쳤다. 마치 저 세상에 사는 수염 긴 신선처럼 말이다.
공부에 찌들어있던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는 놈이나 못하는 놈이나 유일하게 그 선생님을 보면 긴장을 풀고 함박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늘이 나이스데이라는 건지 앞으로 나이스 데이가 되라는 말인지도 모른 채 그저 나이스 데이를 외쳤다.
얼마 전, 신문에서 한 변호사의 에세이를 읽다가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녀는 스승의 날이 되면 떠오르는 선생님이 있다고 했다. 종업식 때 선생님이 울보인 자신에게 엄마처럼 많이 웃으라고 말해 주었다. 자신에게는 오 남매를 돌보느라 늘 한숨 쉬고 삶을 버텨내는 것처럼 보이기만 했던 어머니였는데 말이다. 선생님은 자식 이야기를 하며 환하게 웃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시고 아이가 보지 못한 엄마의 미소를 전해주었다. 이후 그녀는 입보다 눈이 먼저 웃는 엄마를 발견했고, 많이 웃기로 결심했고, 세상을 더 밝게 보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선생님의 말이 어떤 의미인 줄은 잘 몰랐지만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단지 한 사람의 긴 인생 여정 중에 가장 빛나고, 어여쁜 학창 시절을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전날 밤새 게임을 하느라 수업 시간에 조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수학 성적이 안 올라 풀이 죽어 있는 아이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땡땡이를 치고 나간 아이들을 가만 두지 않으리라 화를 내기도 하고...
나는 이제 교사가 아닌 엄마가 되었다.
학교에서 점심 먹고 양치 좀 하라고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다 꾀가 떠올랐다. 아이 몰래 선생님께 메시지를 남겼다. 아이들이 점심을 먹고 하교 후에도 간식을 먹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닦지 않아 치아 관리가 안 되는 것 같으니 선생님께서 한번 언급해 주십사 부탁드렸다. 유치원생도 아닌데 선생님께 이런 부탁을 드려 죄송하다고 덧붙였다. 우리 집에 있는 아이 두 명도 건사하기 힘든데 20명이 넘는 아이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은 오죽할까 상상하며. 다음 날 아이가 말했다.
“엄마, 휴대용 칫솔, 치약 있어?”
“왜?”
“갑자기 우리 반 애들이 점심 먹고 양치를 하기 시작했어. 나도 이제 양치하려고.”
선생님이 알림장에 ‘양치도구 챙기기’ 문구를 적고, 아이들에게 한 마디 언급하신 이후였다.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속으로 크크거리며 평소에 좋아하는 향으로 치약을 챙겨주었다.
선생님의 사소한 한 마디도 아이들에게는 영향력이 크다. 아이들은 하루 중 학교에서 친구들, 선생님과 보내는 시간이 많다. 어쩌면 클수록 부모님보다 선생님과 친구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각박해져 버린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한국교원단체 총연합회가 교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교사들의 49퍼센트는 직업적인 자부심이 낮아졌다고 답했다. 지난 1년간 사직을 고민한 교사도 절반이 넘는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선생님들은 더 이상 스승의 날이 기쁘지 않다고, 부담스럽거나 인위적이라 느낄지 모른다. 선생님께 커피 한 잔, 손수건 한 장 드릴 수 없어 짧은 메시지로 전하는 감사의 마음이 짙어진 그들의 무력감과 회의를 덜어주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우리는 부모와 교사로서 모두 완벽하지 않지만 감사와 존중을 마음에 지니고 서로를 대할 수 있는 어른이기를 희망하며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려볼 수 밖에 없다.
가끔 스승의 날이면 휴대폰에서 10년 전 제자들 이름이 뜬다. 이제 훌쩍 커 버려 장가갈 나이가 되어버린 제자들이 나의 안부를 묻는다. 나는 더 이상 분필을 들고 있지 않다. 한 놈의 인생을 구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나는 이 세상 선생님들의 힘을 믿는다.
좋은 스승은 마음의 세계를 살필 줄 안다. 언제나 어디에나 한 아이의 마음을 그리고 훗날 아이들의 인생 한켠을 비춰줄 좋은 스승들이 교탁 앞에 서 있음을 안다. 너무 늦지 않게 스승의 날이 선생님들에게 ‘나이스 데이’가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희망해 본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하루하루도 더불어 찬란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