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정한 사람이 아닌데

세상은 이상적 다정함을 원할 때

다들 무비판적으로 다정함을 강조하는 시대다. 다정함이 이긴다느니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느니 하지만, 나는 우리 슬롯에 은은하게 퍼져 있는 판타스틱 다정함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으로서 할 말이 있다.


일대일 만남이나 다수와 만나는 자리(독서모임이나 강의도 마찬가지)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한낮에도 침대에 풀썩하고 눕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진다. 친하지 않은 누군가를 상대할 때마다 최대치의 '억텐'을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관계를 맺을 때 예의이자 성의이다.


힘을 뺀 보통 상태에서는 리액션도 적고, 얼굴 표정도 다양하지 못해서 자칫 경청을 해놓고도 집중 안 한다거나 영혼 없다는 오해를 받기 일쑤다. 어쩔 수 없이 그 순간만큼 내 앞에 상대(개인 혹은 여러 명)에게 온통 에너지를 쓰며 신경이 곤두선 상태라야 겨우 살뜰히 챙긴다는 느낌을 받게 할 수 있다.

(고기를 구울 때나 할 때도 허리도 아프고 잘 못 구워서 나서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걸 대신하는 사람이 다정해 보이는 인상, 또 그 반대인 나는 다정하지 않은 인상은 어쩔 수가 없다. 고기는 잘 구우는 사람이 굽고, 수저는 가까운 사람이 움직여서 놓으면 되지 않을까.)

양심에 찔리는 일이 많아서 눈을 못 마주치는 게 아니라, 계속 바라보는 게 민망할까 봐 어색한 시선처리를 하는 사람도 많다. 난 그 중에 한 사람이다. 근데 또 대화할 때 눈을 안 마주치면 못 믿을 사람이라는 지론이 널리 퍼져있더라. '나답게 살라' 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게 사랑의 정석처럼 알려진 자기계발서 판매율 1위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참 피곤하다.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 슬롯에서 연상하는 다정함의 기준이 너무 이상적이진 않은가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최대치의 억텐을 끌어올려야만이 눈도 마주치고 말투도 따뜻하게 들리도록 말하는 사람들도 이 지구상엔 함께 살고 있다고.


​이건 단지 그 순간의 진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냥 내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 그러할 뿐. 이런 비언어적인 것에 대해 언어로써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구차하기도 하지만, 친하지도 않은 이들에게 부담을 주기도 하고 딱히 매번 설명할 시간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정리 차 이런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저 원래 차갑고 날카로운 사람 아니에요. 오해랍니다.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저 말고도 이런 사람들 많답니다?


나 같은 부류에게 다정함이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에너지 소비다. 또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소비'라고 표현했다고 사람에게 에너지를 쓰기 싫다는 게 아니라는 점. 그저 사실이, 사실이 그렇다는 말이다. 매번 바짝 긴장하고 거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다 노력해야만 한다는 말이란 말이다. 나처럼 자연스럽게 에너지 분배가 되지 않아서 인간관계가 어려운 사람도 많다.


처음 보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섞인 식사 자리가 있다? 세상 즉흥형(P)인 내가 꼭 미리미리 두통약과 소화제를 챙겨 먹고 간다. 안 그러면 어김없이 그날은 체로 고생한다. 집에 와서 끙끙 앓거나 다 토하고 겨우 지친 채로 잠든 적이 숱하다. 이렇다 보니 ​역설적이게도 내가 편하게 느끼는 사람일수록 덜 다정하게 대하고 만다. 상대적으로 긴장을 내려놓게 되니까.



나는 그래서, ​모두가 겉으로 비치는 다정함을 예찬할 때 나에게로의 안온함과 외부로의 선명함에 대해 역설하고 싶었다.


​나에게로의 안온함이란, 타인에게 에너지를 쏟아붓느라 소진된 나를 고요하게 쉬게 해주는 자신을 향한 노력이다. 외부로의 선명함이란, 모든 상황에서 다정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할 말은 하는 태도를 말한다. 특히 대중을 상대하는 직업이라는 걸 약점으로 삼아 무례하게 대하는 이에게는 속내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태도가 나쁜 게 아니라는 것. 이것은 다정함이 좋은 기준이 된다는 데 반기를 들겠다는 게 아니다. 다정함의 형태가 한 가지만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은 거다.


'사귀어서 정이 든 정도. 또는 사귀어서 든 정'을 '정분'이라고 사전적으로 정의한다. '다정하다'는 건 이 '정분이 두터운' 걸 의미한다.

이렇게 따져 보면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다정을 바라는 것도 본래 의미와는 배치된다. 친한 사이에서 다정함 역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건 흔하게 말하는 높은 기준의 이상적 다정함이 아니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 안에서는 투명해지는 것이 도리어 본질적 의미의 다정함이란 소리다. 그동안 쌓아온 두터운 정으로 서로 이해하는 사이가 다정한 사이니까.


예의를 저버리고 투명해진다는 게 아니다. 모든 솔직함을 친한 사이에서 허용하길 바라는 것도 무례라는 데 이견이 없다. 다만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배려와 희생을 받고 싶은 건 모든 인간이 대우받는 존재라는 인정 욕망의 실현과 편안함에 기인한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그걸 지켜야 하는 시간이 있는 법이지, 이상적 다정함을 생의 모든 순간 속에서 기대하며 함부로 다정하다/아니다 잣대를 들이대는 건 다정함이 세상을 구하기커녕 멸망시키는 길이 아닐까 한다.

우후죽순 쏟아져 나와 인기를 끄는 다정함에 대한 바카라에서도 그런 걸 바라는 메시지로써 다정함을 예찬하는 건 아니리라 생각한다. 바카라은 끝까지 읽지도 않은 채 표면적인 키워드에만 꽂힌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합리적이지 못하게 다정함의 환상적인 정의를 정해두고서 그 기준으로 사람을 착각하고 판단하는 게 나는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다.

완벽한 다정함의 이상을 깨고 불완전하고 부족한 인간미도 존중해 주세요.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다정함도 그저 상대적인 한 부류일 뿐 절대적 기준은 아니니까요. 이상적인 다정함이 판치는 AI시대에 인간끼리 잘 뭉쳐 살았으면 합니다. 조금 덜 다정한 인간이래도 괜찮은 인간이에요. 어쩌면 그게 정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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