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몸은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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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처음 수영장에서 물에 들어가기 전, 나는 자신만만했다. 고개를 돌려 숨을 쉬는 타이밍, 발끝으로 물을 차는 리듬. 강사의 설명을 몇 번이나 들었고, 머릿속으로 동작을 그려봤고,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물에 들어가는 순간, 그 모든 지식은 쓸모가 없었다.
팔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숨을 쉬어야 할 타이밍에 물을 먹었다. 머리로는 분명히 '지금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몸은 다른 순간에 움직였다. 생각과 몸 사이에 시차가 있었다. 그 시차만큼 나는 가라앉았다.
몇 주가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몸은 생각과 다른 속도로, 다른 방식으로 배운다는 것을.
어느 날 문득 손이 알아서 물을 잡고 있었다. 발이 알아서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이 멈춘 순간 수영이 시작됐다.
머리가 이해한 것과 몸이 아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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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험을 가장 정밀하게 설명한 철학자가 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에서, 그는 당대 철학을 지배하던 전제 하나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데카르트 이후 서양철학은 몸을 정신의 도구로 다뤘다. 정신이 명령하면 몸이 수행한다. 의식이 주체이고 몸은 그 의식이 세계와 상호작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계 장치다.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물었다. 정말 그런가.
그가 주목한 사례가 있다. 1차 대전 부상으로 뇌 손상을 입은 환자 슈나이더. 이 환자는 이상한 증상을 보였다. 모기가 물면 정확히 그 자리를 긁을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코를 만져보세요"라고 말하면 할 수 없었다.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상황에서는 몸이 완벽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추상적으로 지시된 동작은 수행하지 못했다.
이 사례에서 메를로퐁티는 결정적인 통찰을 끌어낸다. 몸에는 그 자체의 지능이 있다. 그는 이것을 신체도식(body schema)이라 불렀다. 몸은 의식의 명령을 기다리는 수동적 도구가 아니다. 몸은 세계를 향해 스스로 조직되는 또 하나의 앎의 방식이다.
자전거를 타는 법을 아는 것은 자전거 타는 법에 대한 명제를 아는 것과 다르다. 피아노를 오래 친 손가락은 악보를 보기 전에 이미 다음 음을 향해 움직인다. 숙련된 운전자는 핸들을 얼마나 꺾어야 할지 계산하지 않는다. 손이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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