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을 따라 걷다가, 진주의 마음을 만났다

나무에 새긴 마음에서 농악의 장단까지, 어느 가을날의 진주

오늘은 조금 천천히 진주를 걸었다.


어디를 꼭 가야겠다고 정해 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눈에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마음이 머무는 곳에서 잠시 멈추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평소 같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풍경들이 하나씩 말을 걸어왔다.


길가에는 작은 흰 꽃이 피어 있었다.

화려하지도, 누군가의 눈길을 끌려고 애쓰지도 않는 꽃이었다. 햇살을 받아 조용히 피어 있는 모습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작다고 해서 아름다움까지 작은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의 하루도 그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귀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에 마음을 새기는 사람들


경남문화예술회관에 들렀다.


제1전시실에서는 제16회 목민각예회원전이 열리고 있었다.


나무를 깎고 다듬어 글과 그림을 새겨 넣은 작품들이 전시장 벽을 채우고 있었다.


붓으로 종이에 쓰는 글씨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 획을 새기기 위해서는 나무의 결을 살펴야 하고, 힘을 조절해야 하며, 한번 파낸 자리를 쉽게 되돌릴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작품 하나하나에서 시간이 느껴졌다.


그중 몇몇 작품 앞에서는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춤’, ‘연’과 같은 글자들이 나무의 결을 만나면서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하나의 형상이 되어 있었다.


글자가 춤을 추고 있는 듯했고,

나무 안에 숨어 있던 이야기를 사람이 조심스럽게 꺼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한 작품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웃음 없는 하루는 낭비한 하루다.”


그 문장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우리는 하루를 잘 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계획하는가.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 처리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가득 담고 살아간다.


그러나 정작 오늘 나는 얼마나 웃었는지,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넸는지는 잘 돌아보지 못한다.


좋은 하루란 어쩌면 많은 일을 해낸 날이 아니라

마음 편히 한번 웃을 수 있었던 날인지도 모르겠다.


도시에는 기억이 쌓인다


전시장을 나오는 길에는 여러 공연과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곧 시작될 제75회 개천예술제 안내도 보였다.

오랫동안 한 도시에서 예술제가 이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는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누군가는 춤을 추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또 누군가는 객석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본다.


해마다 사람은 바뀌지만 그렇게 쌓인 기억은 도시의 역사가 된다.


문화는 거창한 곳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거리의 현수막 한 장에도,

전시장 한쪽의 작은 작품에도,

동네를 걷다 우연히 발견한 꽃 한 송이에도

그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이 스며 있다.


그리고 다시, 남강으로


발걸음은 다시 남강으로 향했다.


오늘 이곳에서는

‘남강을 휘감은 천년의 소리, 1966 진주농악’ 공연이 열린다.

조금 일찍 도착해 객석에 자리를 잡았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의 무대는 고요했다.


악기는 아직 울리지 않았고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찾아 앉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뒤 꽹과리와 장구와 북이 울리기 시작하면 이 조용한 공간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무대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오늘 하루 동안 만난 것들은 서로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면서도 어딘가 닮아 있었다.


나무를 깎아 글자를 새기는 사람도,

무대에서 농악을 이어가는 사람도,

거리에 꽃을 피우는 작은 생명도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이어가고 있었다.


전통은 살아 있는 현재다


우리는 흔히 전통을 ‘옛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농악을 기다리며 앉아 있으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전통은 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는 과거가 아니라

오늘 누군가가 다시 연주하고,

누군가가 바라보고,

누군가가 즐기면서 이어가는 현재의 삶이 아닐까.


연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배우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다음 사람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만나야 전통은 다시 미래로 갈 수 있다.


오늘 나는 무대의 주인공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관객이다.


하지만 어쩌면 문화라는 것은 이렇게 바라봐 주는 사람, 박수를 보내는 사람, 그리고 그날의 기억을 마음에 담아 돌아가는 사람들까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진주에서 얻은 것


별다른 계획 없이 시작한 하루였다.


꽃 한 송이를 바라보고,

나무에 새겨진 글을 읽고,

다가오는 축제의 포스터를 보고,

남강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농악 공연을 기다리며 객석에 앉아 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도시를 여행한다는 것은 꼭 멀리 떠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사는 곳을 조금 천천히 바라보는 것.


늘 지나던 길에서 한번 멈춰 서 보는 것.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만으로도 익숙했던 도시는 새로운 곳이 된다.


잠시 후 꽹과리가 울릴 것이다.


장구와 북이 뒤따르고

남강에는 사람들의 장단과 웃음이 번져갈 것이다.


오늘 내가 걸으며 만났던

꽃과 나무와 예술과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 장단 속에서 하나로 이어질 것만 같다.


남강을 휘감는 소리를 기다리며,

오늘도 내가 사는 진주를 조금 더 알아간다.


2026년 9월 20일

진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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