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가족 슬롯에는 남편의 계급과는 또 다른 계급이 있었다.
소령으로 진급한 남편은 운천으로 발령을 받아 부대를 옮겼다. 군인 가족은 보통 2년에 한 번씩 짐을 싼다. 이사비용이야 나라에서 대준다지만, 그렇다고 번거로움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게 누군가에게는 설렘일지 몰라도, 군인 가족의 삶에는 그런 낭만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계급슬롯이기 때문이다. 새 부대에 가면 상사들 댁을 돌며 인사를 드려야 했고, 주말마다 이어지는 회식에 빠짐없이 참석해야 했다. 군인가족 슬롯라는 울타리 안에는 남편의 계급과는 또 다른, 아내들만의 계급이 존재했다.
그때 나는 의정부에서 피부관리실을 확장하며 한창 바쁘게 지내던 시기였다. 주말마다 테니스를 치고 회식 자리를 따라다니는 일정이 나에게는 일보다 더 버거웠다.
한번은 일이 늦게 끝나서 갈 수 없다고 미리 말해두었다. 그런데 여단장님이 인사참모 가족이 도착할 때까지는 회식을 끝내지 않겠다고 했다는 말이 전해졌다. 결국 관리실 문을 닫고 한 시간을 달려 운천까지 갔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창밖으로 어두워진 국도가 스쳐 지나가는 내내, 도착하면 남편에게 쏟아낼 말들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내 시간은, 내 일은 왜 항상 뒤로 밀려나야 하나.
회식 자리에 도착했을 때, 정작 나를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만든 사람들은 이미 다들 취해 있었다. 화를 쏟아낼 틈도 없이, 나는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한 사람씩 관사 앞에 내려주고,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야 비로소 그 밤의 분노가 조용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정작 화를 낼 대상들은 이미 취해서 아무것도 몰랐고, 그 밤을 온전히 감당한 건 결국 나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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