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준 칼럼] 관계만 강요하는 폭력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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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람들은 유난히 '사이다 드라마'에 열광한다. 『참교육』, 『악마판사』, 『모범택시』와 같은 작품들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이유는 단순히 악인을 통쾌하게 응징하기 때문이 아니다. 슬롯를 유지하고 있던 공공선 즉, 전통과 예절, 법과 제도, 규칙과 상식이 해결하지 못한 슬롯적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악이 제대로 처벌받지 못하고, 정의가 제때 실현되지 못한다는 답답함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시청자는 드라마 속 초법적 응징에서 대리만족을 얻는다.


그러나 이 현상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것을 단순한 법과 제도의 실패가 아니라 존재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현대슬롯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슬롯는 새로운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과거의 관계만 유지하려 한다.


AI 시대는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을 초개인(Hyper Individual)이라 부른다. 인터넷, 펜데믹, AI를 거치면서 탄생하게되는 초개인은 더 이상 전통적 집단에 종속된 개인이 아니다.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AI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다. 그런데 슬롯는 여전히 과거 산업슬롯의 인간을 기준으로 학생과 교사, 부모와 자녀, 회사와 직원의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그래서 갈등이 생긴다. 교사는 학생을 위해 사진을 찍어 주지만 학생은 사생활 침해라고 느낀다. 부모는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녀는 간섭이라고 느낀다. 회사는 조직문화를 말하지만 직원은 통제라고 받아들인다. 서로 악의를 가진 것이 아니다. 서로가 상대를 다르게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톨로지는 관계보다 존재를 먼저 묻는다. 상대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지금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관계부터 요구하면 관계는 쉽게 폭력으로 여겨진다. 상대는 달라졌는데 관계는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슬롯적 공공선은 관계를 중시한다. 법과 규칙, 전통과 예의, 상식과 질서를 통해 공동체를 유지하려 한다. 그것은 슬롯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가치다. 그러나 그 관계는 언제나 존재의 정의를 전제로 한다. 구성원의 존재가 바뀌면 관계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문제는 지금 우리 슬롯가 새로운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과거의 관계만 강요하고 있다는 데 있다. 초개인을 과거의 학생으로 대하고, 초개인을 과거의 근로자나 직원으로 대하고, 초개인을 과거의 시민으로 대한다. 존재는 미래로 갔는데 관계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규칙이 아니다. 더 많은 예절교육도, 촉법소년의 나이를 낮추는 법의 개정만도 아니다. 먼저 새로운 시대의, 새로이 탄생한 현대적 인간을 다시 정의하는 일이 우선이다. 존재를 새롭게 정의할 때 관계도 새롭게 설계될 수 있다. 그것이 온톨로지가 관계보다 존재를 먼저 말하는 이유다.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갈등의 본질은 관계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새로운 존재를 과거의 관계 속에 억지로 가두려 하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진정한 개혁은 관계를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다시 정의하는 데서 시작된다. 관계는 존재 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존중이 되고, 존재를 잃은 관계는 비꼼, 비하, 차별, 무시, 조롱을 수반하며 결국 폭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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