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알고 있었을까?
J의 남편 H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어느 날, 나는 남편과 함께 남편의 사진첩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남편과 H가 뚜껑 열린 스포츠카 안에서 엄지를 치켜세운 사진이 나왔다.
포르쉐였다.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H는 애들이 다섯 살, 세 살인데 왜 2인용 포르쉐를 샀대?”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타고 싶었겠지. 개인의 자유잖아.”
의외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물었는데 자유, 평등, 묵비권 같은 거창한 단어가 나오면 의심부터 한다.
구린 행동을 포괄적인 가치로 포장하려는 썩은 냄새가 났다.
부자도 아닌 사람이 어린아이 둘을 태울 수도 없는 포르쉐 스포츠카를 굳이 한 대 더 마련한 이유가 무엇일까.
H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우연히 동창 모임에서 만난 A와 감정이 발전했다고 했다. 심지어 남편과, H와 A는 셋이서 저녁을 여러 번 먹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관계를 사랑이라고 정의하기 시작하면, 그 관계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확인받고 싶어 한다.
아, 그래서 그동안 남편이 H를 유난히 자주 만났던 거구나.
심장이 빨리 뛰었다.
H와 J는 아이들까지 데리고 가끔 함께 만나던 사이였다.
나는 물었다.
“그 집은 어때? J는 아무것도 몰라?”
남편은 J가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시부모님 댁에 가고, 종교에 많이 의지하며 지낸다고 했다. 시부모님은 이혼만큼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이어서, J 역시 그 관계를 붙잡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다그쳤다.
“그래서 오빠는 바람난 친구한테 뭐라고 했어?”
“뭘 뭐라고 해. 다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다 큰 성인인데.”
구린 놈 옆에 거짓말쟁였다.
더 추궁하고 나서야 알았다. 남편은 H에게 J와 헤어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음이 떠났다면, 사랑이 끝났다면, 더 이상 같이 살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신의, 사랑, 가족, 바카라임 같은 무거운 단어들이 갑자기 한낱 낙엽같이 보였다.
너덜너덜 시들어 빗자루로 쓸어 담아 쓰기통에 담겨지는 그런 정도의 가벼움.
그 뒤로 2년쯤 지나서 다시 H와 J 부부를 만났었는데, J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웠다. 몇 년째, H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 마음이 흔들릴 수는 있다. 이 세상에 멋진 사람은 차고 넘친다. 배우자 아닌 누군가가 좋아 보이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몇 년간 한 사람에게는 남편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연인으로, 필요에 따라 이 집 저 집을 오가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자유라고 옹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기심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부부의 문제는 제 3자가 함부로 재단하기 어렵다. 모든 맥락을 알 수도 없고, 당사자만큼 이해할 수도 없으며, 각자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사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랬다.
그 후로 또 2~3년쯤 지났을까. 문득 생각나서 남편에게 물었다.
“아직 H와 A가 만나고 있어? J는 집에 두고?”
아니, 헤어졌다고 했다.
“풋.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이라더니. 왜?”
나는 냉소적으로 되물었다.
H가 어느 날 둘째를 보는데 너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이 관심을 못 준 사이, 아이들이 너무 잘 자라 있어 J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무바카라임하고, 가볍다.
결혼이란 무엇이고, 사랑이란 무엇일까.
결혼을 성(城)에 비유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성 안에 있는 사람은 성벽의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거기엔 대가가 따른다.
바카라임과 약속, 갈등과 타협, 그리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노동이 엉겨붙어 한데 온다.
그래서 가끔 성 밖의 자유가 궁금하다. 답답한 날이면, 흥미롭고 자극적인 삶이 성 밖에 분명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허나, 성 밖에 자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 밖의 사람은 성 안의 안정과 따뜻함을 부러워 하기도 한다. 정작 성 안으로 들어가보면 사람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단지 성 안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다.
결혼한 사람이 멋있어 보일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그 사람은 온전히 그 사람 혼자 만든 결과물이 아니다.
균형 잡힌 모습, 배려하는 태도, 정돈된 생활, 안정감. 그런 좋아보이는 것들은 오랜 관계 속에서 풍화작용을 통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배우자와 수없이 부딪히고, 싸우고, 사과하고, 타협하고, 다시 함께 살아보려고 애쓰면서 생긴 모습인 것이다. 마치 바람과 물이 오랜 시간 돌의 모양을 바꾸듯이.
그래서 지금 눈에 들어온 몇 가지 매력만 보고 한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한 단면일 뿐이니까.
그런데 관계는 한 시점의 단면만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작년의 나와 올해의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다. 매일 무언가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해석하고, 조금씩 다른 생각과 습관과 성격을 만들어간다. 동일한 일을 겪더라도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더 멀리 돌아가 서른 살의 나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입만 살아있고, 긴 계획 없이 하루하루 어떻게든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철없고 모자랐던 그때의 나는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사람은 변한다. 사람 고쳐쓰는 것 아니라고, 안 변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세하게 계속 변한다.
과거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오늘의 선택에 반영한다면, 내일은 어제와 같지 않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되돌아보면 출발했던 그 점과는 꽤 멀리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결혼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이 동시에 변하기 때문이다.
몇 년전의 배우자 역시 지금과 같은 사람이면서도 다른 사람이다. 그러니, 평생에 걸쳐, 한 사람과 반복해서 다른 이유로 사랑에 계속 빠질 수 있다면, 그래서 같은 방향을 보면서 갈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축복이다.
안타깝게도 각자 변하는 동안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고, 교감하지 않고, 서로를 다시 알아가려는 노력을 멈추면, 같은 집에 살면서도 몇 년 뒤에는 전혀 다른 행성에서 각자 참호를 파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 평생을 약속해야 한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조차 완전한 답은 아니다.
지금 대화가 즐거운 그 사람이 십 년 뒤에도 같은 생각을 하고, 나와 비슷한 유머에 반응하며, 비슷한 관심사를 가질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
결국 평생 함께 산다는 것은
한 사람을 한 번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계속 변하는 한 사람을 여러 번 다시 선택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잘 해낸 관계가 더 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