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우리를 흩어놓았지만, 그날의 우리는 남아 있었다

여주 영릉의 가을, 스무 해를 건너 다시 만난 벗들

by담우

가을이 깊어가면 문득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잊히지 않는 사람들. 오랜 세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마주하는 순간 그 사이의 시간이 무색해지는 사람들.

2014년 10월 말, 여주에서 잠시 생활하던 나는 젊은 날 함께 뜻을 나누었던 벗들과 다시 만났다.

우리가 향한 곳은 세종대왕의 능이 자리한 여주 영릉이었다.

가을빛이 짙게 내려앉은 능역에는 오래된 소나무들이 서 있었고, 은행나무는 눈부시게 노란 잎을 흔들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그 풍경 속에 함께 서 있었다.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을 건너서.


여주 영릉.jpg여주 세종대왕릉에서




가을이 짙게 물드는 세종의 능 아래,

우리는 세월을 가르고 다시 섰다.

모든 것이 빛바랜 듯 고요한 이 계절에

뜻을 나눈 벗들의 그림자가 다시 겹쳐진다.

20여 년의 풍파.

저마다의 삶이라는 전장으로 흩어졌던

가슴속 붉은 깃발들이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펄럭인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안다.

젊은 날, 우리는 부정하다고 여긴 현실 앞에서

정의라는 날을 세워 함께 부딪쳤다.

때로는 깨지고, 때로는 부서지면서도

서로의 어깨를 믿고 버텼던 시간.

그때 우리가 품었던 생각이

모두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절의 우리는

무엇이 옳은 삶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그 진심만큼은 부정하고 싶지 않다.

세월은 우리를 저마다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누군가는 삶의 무게를 견뎌냈고,

누군가는 뜻하지 않은 굴곡을 지나왔을 것이다.

젊은 날의 얼굴에는 주름이 생겼고,

목소리에도 세월이 묻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그 많은 세월이 잠시 사라지는 듯했다.

긴 설명도 필요 없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일일이 묻지 않아도

함께했던 시간은 서로를 알아보고 있었다.

지금 이 공간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래전 우리가 나누었던 신념이

세월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했을지라도,

서로를 향한 믿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가을바람이 능역의 나무들을 스쳐 갔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가지 끝에서 흔들렸다.

언젠가 저 잎들도 모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나무는 그 자리에 남아

다시 돌아올 계절을 기다릴 것이다.

우리도 그랬던 것일까.

삶은 우리를 멀리 흩어놓았지만,

젊은 날 함께 뿌리내린 시간만은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날 우리는 특별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

다시 젊어질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함께 걸었고,

오래된 얼굴들을 바라보았으며,

같은 가을바람을 맞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2014년 어느 늦가을 여주 영릉에서 짙디 짙은 은행나무 단풍에 취하다


십수 년이 흐른 지금, 그날의 사진을 다시 꺼내 본다.

영릉의 기와지붕 너머로 펼쳐진 가을 숲. 눈부시게 노란 은행잎. 그리고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풍경 속에 함께 있었던 벗들.

당시에는 재회의 기쁨이 컸다.

그러나 지금 다시 돌아보니 그날의 만남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젊은 날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떤 모습으로 평가하든,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잃었든, 한때 우리가 무엇을 꿈꾸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

그런 벗이 있다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귀한 일이 된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는다.

생각도 바뀌고,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진다.

한때 목숨처럼 붙잡았던 신념조차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그 변화가 젊은 날의 진심까지 지워버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우리가 함께 지키려 했던 것은 어떤 구호만이 아니라, 서로를 믿었던 마음이기도 했다는 것을.

이제는 그 시절처럼 세상과 맞서 싸울 힘보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마음이 더 절실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젊은 날의 열정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불꽃이 조금 더 깊고 조용한 곳에서 타오르고 있을 뿐이다.

2014년 가을, 여주 영릉에서 우리는 잠시 그 불꽃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오늘, 오래된 사진을 바라보며 나는 또 한 번 그날의 벗들을 떠올린다.

세월은 우리를 흩어놓았지만,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까지 흩어놓지는 못했다.

가을이 깊어간다.

그날의 은행잎은 오래전에 떨어졌겠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직 그 가을이 노랗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