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벽마다 신발을 벗는다

땅을 밟으며 다시 자연의 일부가 되는 시간

by담우

새벽이면 나는 집 근처 뒷산으로 간다.

거창한 산행은 아니다.

잘 가꾸어진 산바카라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내가 좋아하는 작은 공간이 나온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동네 뒷산의 산바카라길일 테지만
내게는 조금 다른 곳이다.

나는 이곳에 오면
신발부터 벗는다.

그리고 맨발로 흙 위에 선다.

처음에는 차갑다.

요즘처럼 가을이 깊어지는 계절이면
발끝으로 전해지는 냉기가 제법 매섭다.

여름에는 부드러웠던 흙이
이제는 겨울이 오고 있다는 것을 먼저 알려준다.

발바닥은 계절을 속이지 않는다.

달력을 보지 않아도 안다.

아, 가을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구나.


접지1.jpg접지하다


발바닥으로 계절을 읽는다

맨발로 걷다 보면
평소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 느껴진다.

마른 흙과 젖은 흙이 다르고,

낙엽이 깔린 길과
작은 돌이 박힌 길이 다르다.

어떤 곳은 따뜻하고
어떤 곳은 유난히 차갑다.

처음에는 돌 하나에도 발을 움츠렸지만
오랫동안 걷다 보니 이제 발이 먼저 길을 읽는다.

눈보다 발이 먼저
땅의 표정을 알아차린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땅과 참 많이 멀어졌다.

아스팔트를 밟고,

콘크리트 건물에서 생활하고,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하루 종일 땅 가까이 살아가면서도
정작 흙을 직접 만지는 일은 거의 없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인간 역시 자연에서 태어났는데
우리는 자연과 닿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처럼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신발을 벗는 순간
무언가를 새로 얻는다는 느낌보다

오래 잊고 있던 감각 하나를 되찾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땅의 기운을 받는다는 것

사람들은 이것을 ‘어싱’이라고 부른다.

접지라고도 한다.

땅과 몸을 직접 연결하는 행위다.

누군가는 전자의 이동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건강 효과를 이야기한다.

나는 그것을 굳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과학적 논리도,
의학적 효과도 잠시 내려놓고 싶다.

내게 접지는 훨씬 단순하다.

내 몸이 원래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하는 시간이다.

흙을 밟고,

나무를 보고,

바람을 맞고,

새소리를 듣는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자연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 역시 그 풍경 안에 들어가 있다.

나무와 내가 있고,

흙과 내가 있고,

바람과 내가 있다.

아니,

어쩌면 그 구분조차 필요 없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잠시 자연의 일부가 된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나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한 시간 남짓.

휴대전화도,

일도,

돈도,

사람도,

해야 할 일도 잠시 멀어진다.

살아가면서 몸에 붙은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걱정도 내려놓고,

욕심도 내려놓고,

어제 들었던 불편한 말도 내려놓는다.

물론 산을 내려가면
그것들은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그대로이고,

해야 할 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같은 문제를 다시 들고 내려가는데도
조금 가벼워져 있다.

문제가 작아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것을 담을 공간이 조금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채우는 시간’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먼저 비우는 시간이다.

자연은 내게 무엇인가를 주기 전에
내 안에 너무 많이 들어찬 것부터 내려놓게 한다.


가을이 울고 있다

며칠 전부터
산의 빛깔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직 완전히 붉지는 않다.

초록 사이로 노랑이 스며들고,
그 사이에 붉은 잎 몇 장이 먼저 계절을 건너가고 있다.

길에는 낙엽이 늘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도
여름보다 넓어졌다.

잎이 떨어진 만큼
하늘이 보인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가을이 울고 있다.

하지만 가을의 울음은
슬픔만은 아닌 것 같다.

나무는 울면서 잎을 버리고,

숲은 울면서 색을 지우고,

땅은 떨어진 것들을
말없이 받아준다.

자연에는 버려지는 것이 없다.

잎은 떨어져 흙이 되고,

흙은 다시 나무를 키우고,

나무는 다시 잎을 만든다.

끝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이미 다음 계절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순환이라고 부른다.


접지3.jpg가을이 운다


자연은 움켜쥐지 않는다

사람은 자꾸 붙잡는다.

돈을 붙잡고,

관계를 붙잡고,

지위를 붙잡고,

지나간 시간까지 붙잡는다.

잃는 것이 두려워
이미 끝난 것조차 놓지 못한다.

그런데 자연을 오래 바라보면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보게 된다.

나무는 가을이 왔다고
잎을 붙잡지 않는다.

꽃은 질 때가 되면 진다.

강물은 지나간 물을
다시 끌어당기지 않는다.

자연은 자신의 때를 받아들인다.

봄에는 피어나고,

여름에는 무성해지고,

가을에는 내려놓고,

겨울에는 비운다.

그리고 다시 봄을 기다린다.

그래서 자연의 균형이란
언제나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채워질 때 채워지고
비워질 때 비워질 줄 아는 것인지도 모른다.


맨발이 가르쳐준 것

맨발로 걷는 동안
나는 자주 발밑을 바라본다.

흙과 돌과 낙엽.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내 두 발.

사진으로 찍어놓고 보니
조금 우습기도 하다.

평생 수많은 곳을 돌아다닌 발인데
결국 흙 위에 서 있다.

사람은 평생
어딘가를 향해 간다.

더 높은 곳,

더 나은 곳,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곳.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새벽의 산에서는
어디로 갈 필요가 없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발바닥으로 흙을 느끼고,

찬바람을 맞으며,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본다.

그때는
무언가를 이루어야 할 나도 없고,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할 나도 없다.

그저 숨 쉬고 있는
한 생명만 남는다.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

우리는 흔히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돌아간다는 표현부터 이상하다.

우리는 한 번도
자연 밖으로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도시에 살아도 자연이고,

나이가 들어도 자연이며,

아프고 늙고 사라지는 것 역시
자연의 시간 안에 있다.

다만 너무 오래 잊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자연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연이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새벽마다
신발을 벗는지도 모르겠다.

땅에서 어떤 특별한 힘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기억하기 위해서.


접지2.jpg자연을 만나는 산바카라길


다시 신발을 신으며

한 시간쯤 지나면
산을 내려갈 시간이 된다.

발에 묻은 흙을 털고
다시 신발을 신는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는
조금 아쉽다.

다시 사람의 세계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일이 있고,

약속이 있고,

돈을 벌어야 하고,

풀어야 할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예전과 조금 다른 것이 있다.

산에 올라올 때의 나와
내려가는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마음속의 무게는 조금 다르다.

무엇 하나 해결한 것은 없다.

그런데도 괜찮다.

어쩌면 균형이라는 것은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흔들린 뒤에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게 접지는
치료법이라기보다 삶의 작은 의식에 가깝다.

매일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잠시 인간이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맨발로 흙을 밟으며
한 생명으로 돌아가는 시간.

가을이 깊어간다.

이제 조금 있으면
맨발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땅도 차가워질 것이다.

나무들은 더 많은 잎을 내려놓을 것이고
하늘은 그만큼 넓어질 것이다.

그래도 가능한 날까지
나는 새벽의 이 길을 걸을 생각이다.

신발을 벗고,

흙을 밟고,

바람을 맞으며.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잠시 그곳에 서 있을 것이다.

자연에게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래 자연의 일부였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가을이 울고 있다.

낙엽이 떨어진다.

찬바람이 분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맨발의 한 사람이
조용히 땅을 밟고 있다.

오늘도 나는 자연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잠시 자연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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