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돌아왔지만, 기억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 12년 전 의정부역 광장에서 찍은 사진 한 장

by담우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다시 꺼냈다.

2014년 4월, 의정부역 광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두 손으로 커다란 구(球)를 받쳐 든 석조 조형물.
그 아래에는 ‘새마을의 날 기념비 건립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12년 전 나는 이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을 남겼다.


2014년 4월 8일 의정부역광장에서 촬영한 사진

/ 의정부역 광장,

이곳이 미군기지였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60여 년, 숱한 오욕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

그 어디에도 제국의 군홧발에 의해 짓밟힌 민중들의 한을 보듬는 최소한의 예의도 없다.

오로지 승리의 노획물을 가로챈 자들의 어색한 기념비와 거대 자본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전리품처럼 널브러져 있다.

역사는 개인의 선택이 거대한 민중의 흐름이 되어 흘러가는 것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건만 역사를 소유하려는 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걸러지고 단절되고 있다. /



그때 나는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서운함이었다.

오랫동안 타인의 군홧발 아래 놓였던 땅이 마침내 시민에게 돌아왔는데, 정작 그 땅이 무엇을 겪었는지 말해주는 목소리가 너무 희미하다는 서운함.

그리고 그 땅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흘렸던 땀과 외침과 기다림 역시 새로운 도시의 풍경 속에서 너무 빨리 사라지고 있다는 허망함이었다.


60년 만에 돌아온 땅

의정부역 앞에는 한때 캠프 홀링워터가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부터 미군이 사용하기 시작했고, 병사 숙소와 사무실, 작업장 등이 자리했던 곳이다. 기지는 2005년 폐쇄되고 2007년 우리 측에 반환됐다. 경기도 자료에 따르면 전체 기지에는 48개 동의 건물이 있었다.

의정부라는 도시에서 미군기지는 단순한 군사시설이 아니었다.

도시의 공간을 갈라놓았고,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했으며, 주변 상권과 생활문화까지 바꾸어 놓았다.

동시에 전쟁 이후의 생존과 일자리, 한미동맹, 기지촌의 삶, 도시개발의 제약과 같은 서로 다른 기억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미군기지의 역사를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누군가에게는 생계였고,
누군가에게는 안보였으며,
누군가에게는 상처였고,
또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되찾아야 할 땅이었다.

그 모든 것이 의정부의 역사였다.


나 역시 그 반환을 요구하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제삼자의 시선으로만 쓸 수가 없다.

나 역시 그 땅의 반환을 요구했던 시간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기지 반환은 어느 날 갑자기 행정문서 한 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시민슬롯와 지역주민들이 목소리를 냈고, 지역의 정치와 행정이 움직였으며, 국가 간 협상이 이어졌다.

그 긴 과정 속에서 나 역시 한쪽 귀퉁이에 서 있었다.

그래서 기지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볼 때 느꼈던 감정은 남달랐다.

담장이 허물어지고 철조망이 걷히던 순간,

나는 그것을 단순한 토지의 반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땅의 주인이 돌아오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주인은 관청도 아니고,
기업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었다.

시민이었다.

그 땅을 밟고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땅이 돌아왔다고 해서 역사가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2012년 무렵부터 의정부역 앞 캠프 홀링워터의 담장이 철거되고 공간이 시민에게 열리기 시작했다.

일부 담장은 과거를 기억하고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상징물로 보존됐다.

이후 공원과 광장이 조성되고 의정부역 민자역사와 상업시설도 들어섰다.

도시는 달라졌다.

철조망 대신 사람들이 걷고,

군용 차량 대신 시민들의 자동차가 오가고,

통제구역이었던 공간에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그 변화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곳을 걸을 때마다 이상한 허전함을 느꼈다.

너무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깨끗하다는 것은 좋은 말이다.

하지만 역사의 공간이 지나치게 깨끗해지면 문제가 달라진다.

아픔도 지워지고,

갈등도 지워지고,

그곳을 되찾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도 지워진다.

결국 남는 것은 새로 지어진 건물과 잘 정돈된 광장뿐이다.


도시는 개발되었지만, 기억은 개발되지 않았다

2014년의 나는 그것을 조금 거칠게 썼다.

"오로지 승리의 노획물을 가로챈 자들의 어색한 기념비와 거대 자본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전리품처럼 널브러져 있다."

12년이 지난 지금이라면 조금 다르게 쓰고 싶다.

문제는 건물이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상업시설이 들어선 것도 아니었다.

도시는 변해야 한다.

사람들은 편리한 역을 원하고, 공원을 원하고, 상업시설을 원한다.

문제는 새로운 것을 세우면서 이전의 시간을 너무 쉽게 지워버리는 우리의 방식이었다.

땅의 가격은 계산했지만,

그 땅에 쌓인 기억의 가치는 제대로 계산하지 못했다.

몇 평인지 계산했고,

얼마의 경제효과가 생기는지는 계산했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겪었고 무엇을 요구했으며 왜 그토록 오랫동안 반환을 기다렸는지는 도시의 중심 서사로 충분히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묻게 된다.

개발이 끝나면 역사는 끝나는 것인가.


역사의 주인은 누구인가

2014년 글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역사는 개인의 선택이 거대한 민중의 흐름이 되어 흘러가는 것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한 문장을 덧붙이고 싶다.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기로 선택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구의 동상을 세우는가.

누구의 이름을 남기는가.

어떤 사건을 기념하고 어떤 사건을 침묵하는가.

그 선택이 모여 한 도시의 기억이 된다.

그래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결코 중립적인 일이 아니다.

기억되는 사람이 있는 만큼 잊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땅을 소유할 수 있지만, 기억까지 소유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도시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 가운데 하나는 자본이다.

반환된 군사시설도 예외가 아니다.

땅이 열리면 가장 먼저 계산되는 것은 면적이고, 용도이고, 개발가치이고, 경제효과다.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도시는 먹고살아야 하고 일자리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공간을 경제적 가치로만 읽기 시작하면 결국 사라지는 것이 있다.

기억이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기억.

오랫동안 담장 때문에 돌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기억.

군용 차량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던 시민들의 기억.

기지 주변에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사람들의 기억.

그리고 그 땅을 시민에게 돌려달라고 외쳤던 사람들의 기억.

그것까지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밀어버린다면 우리는 땅은 되찾았지만 역사는 잃는 셈이다.


반환 이후에야 비로소 반환이 시작된다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미군기지 반환’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철조망을 걷었다고 반환이 끝난 것은 아니다.

토지대장상의 소유권이 바뀌었다고 반환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반환은 그 공간의 기억까지 시민에게 돌아올 때 완성된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왜 그곳에 있었는지,

그로 인해 도시와 시민들이 무엇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 땅을 되찾기 위해 누가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를 다음 세대가 알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반환은 공간의 반환에 머물 뿐,

역사의 반환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모든 역사를 피해와 억압의 역사로만 기록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서로 다른 기억을 있는 그대로 남기자는 것이다.

역사는 한쪽의 기억만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은 바뀌었으나 주인은 없다

반환 이후의 풍경을 바라보며 자문해 본다.

과연 이 땅의 진짜 주인은 돌아왔는가.

미군이 떠나간 자리를 권력과 자본이 들어차 지배하는 한,

그 서글픈 주객전도의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이 땅의 역사는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의 손에서 세워지고 만들어진다.

숱한 민중의 한과 희생은 전리품의 그늘에 가려진 채 여전히 변방을 맴돈다.

하지만 기억하는 자가 있는 한, 지워진 역사는 소멸한 것이 아니다.

2014년에 적어 내려간 나의 쓸쓸한 고백은,

자본의 콘크리트 아래 묻힌 진실을 끊임없이 호출하는 고독한 파수꾼의 비명인지도 모른다




에필로그|땅은 돌아왔지만, 기억은 아직 돌아오는 중이다


2014년의 나는 사진 속 기념비를 바라보며 분노했다.

2026년의 나는 같은 사진을 바라보며 조금 다른 감정을 느낀다.

분노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아쉬움이고,

아쉬움보다 더 깊은 것은 질문이다.

우리는 과연 이 땅을 제대로 돌려받았는가.

미군이 떠나고,

철조망이 걷히고,

건물이 들어서고,

땅값이 오르는 것이 반환의 완성이라면 대답은 ‘그렇다’ 일 것이다.

그러나 반환이란 한 도시가 자신의 기억과 존엄을 되찾는 과정까지 포함하는 것이라면 나는 아직 쉽게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그 반환을 요구했던 시간 속에 있었다.

그래서 더욱 바란다.

누가 더 큰 공을 세웠는지를 기록하기보다,

왜 평범한 사람들이 그 땅을 돌려달라고 했는지를 기록했으면 한다.

누가 승리했는지를 새기기보다,

그 과정에서 누가 기다렸고, 누가 상처받았으며, 누가 목소리를 냈는지를 남겼으면 한다.

언젠가 지금의 아이들이 의정부역 광장을 걸으며 물었으면 좋겠다.

“여기에 예전에는 무엇이 있었어요?”

그때 우리는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미군기지가 있었다고.

전쟁과 분단이 있었다고.

그 속에서 먹고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 땅을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려놓으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그것이면 된다.

그들의 이름이 모두 비석에 새겨지지 않아도 좋다.

역사의 주인은 원래 몇 사람의 이름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시간이 모여 역사가 되고,

그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비로소 한 도시의 기억이 된다.

사진 한 장을 다시 서랍에 넣으려다 멈춘다.

이제는 세상 밖으로 꺼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땅은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어쩌면 땅보다 더 오래 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잊지 않는 일.

그것이 반환 이후,
우리에게 남겨진 또 하나의 반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