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외포리 해변에서 일상의 관성을 멈추다
강화도 석모도 가는 길목 외포리 해변에서
"삶도 때로는 썰물처럼 비워져야, 다음 밀물을 맞을 수 있다."
어디로든 숨어들고 싶었던 날이었다.
누군가의 기대와, 끝없이 이어지는 해야 할 일들과,
매일 같은 속도로 돌아가는 일상의 궤도가
문득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찾았다.
동해가 아니라,
강화 외포리의 서해를.
외포리 바다는 조용했다.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고,
수평선은 흐린 하늘과 맞닿아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
경계를 잃고 있었다.
그 적막한 풍경 앞에서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보다 먼저,
숨이 길어졌다.
해변 둑방길에는
노란 금계국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있었다.
꽃들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피어 있지 않았다.
갯벌이 넓다고 초라해하지도,
하늘이 흐리다고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제 계절이기에 피어 있었고,
제 바람이기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평범한 아름다움 앞에서
괜히 마음이 먹먹해졌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열심히 살았는데도
마음이 자꾸 비어 가는 날.
사람들 틈에 있는데도
혼자인 것 같은 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계속 앞으로 걸어왔지만,
정작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 없는 날.
나는 그런 마음을 안고
외포리 바다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썰물로 텅 빈 갯벌을 보고 있는데,
오히려 마음은 채워지고 있었다.
바다는 말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가득 차 있는 것만이 풍요로운 것은 아니라고.
밀물이 물러간 자리에는
조개가 숨 쉬고,
게가 지나가고,
새들이 머문다고.
비어 있는 시간 속에서도
생명은 조용히 자라고 있다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실패도,
상실도,
외로움도 아니었다.
텅 빈 나를 마주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늘 무언가를 채우려 했고,
더 바쁘게 움직였고,
더 많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바다는,
가장 넓은 몸으로
가장 조용한 진실을 들려주고 있었다.
비워내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들어오지 못한다고.
서해는 동해처럼 격렬하지 않다.
거센 파도로 세상을 향해 소리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천천히 밀려왔다가
천천히 물러나며
모든 것을 기다려준다.
그 넉넉함이,
나는 좋다.
어쩌면 서해는 세상의 모든 엄마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말없이 기다려주고,
군말 없이 안아주고,
상처투성이인 채 돌아온 자식에게
괜찮다고,
조금 쉬었다 가라고
잔잔한 물결로 등을 토닥여주는 사람.
한참을 바다 앞에 서 있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갈 것이고,
내일이면 나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오늘,
나는 외포리에서
비워내는 법을 배웠으니까.
돌아오는 길,
백미러 속 바다는 점점 멀어지고,
노란 금계국은 작아져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속에는
갯벌보다 넓은 여백 하나가 생겨 있었다.
그곳에는
조급함 대신 기다림이,
욕심 대신 평온이,
불안 대신 잔잔한 물결이
조용히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안다.
삶은 늘 채워가는 과정이 아니라,
때로는 기꺼이 비워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래야 다시,
밀물이 오듯
사랑도,
용기도,
살아갈 힘도
내 안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강화 외포리의 바다는
그날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텅 빈 갯벌과 노란 꽃들의 흔들림으로,
가장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