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가 일깨우는 생명의 본질
본성을 거스르는 인간의 완악함에 대하여
장자는 말했습니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그것을 자르면 학은 슬퍼하고,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그것을 늘리면 오리는 괴로워한다고 말입니다.
'길다'와 '짧다'는 것은 인간이 세운 상대적 기준일 뿐,
자연의 관점에서는 저마다의 최선일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교정하려 듭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완악함'입니다.
우리는 '성공'이나 '안정'이라는 규격화된 틀을 만들어두고,
그 틀에 맞지 않는 자신의 본성을 억지로 자르거나
타인의 삶을 제어하려 합니다.
마치 하수구 철창이 잡초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 여겼던
우리의 편협한 인식처럼 말입니다.
진정한 무위는 행동하지 않는 행동
"진정한 무위란 행동하지 않는 행동을 말한다."
이 역설적인 문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태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인위적인 의도를 내려놓고,
사물이 가진 본래의 결을 따라 움직이는 '함이 없는 함'입니다.
새해 아침, 나비처럼 보였던 나비란의 꽃은
인간이 억지로 피워낸 것이 아닙니다.
그 작은 식물은 혹독한 겨울 속에서 자기만의 속도로 피어날 준비를 마쳤고,
때가 되자 자연스럽게 그 아름다움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행동하지 않는 행동'의 정수입니다.
우리가 결과를 장담하며 억지로 실행을 밀어붙이기보다,
존재의 시간을 견디고 믿어줄 때 생명은 비로소 완성됩니다.
행위의 정지와 포기는 소유를 넘어선 자유
우리가 추구하는 '행위의 정지와 포기'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소유하고 조종하려는 '에고(Ego)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텃밭에서 방아깨비의 밀회를 목격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인간의 도덕적 잣대로 해석하려던 시도를 멈추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편견을 포기하는 순간,
비로소 자연의 숭고한 지혜가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소유하기 위해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 현명함 역시 이 지점에서 탄생합니다.
움켜쥐려는 손을 펼칠 때,
우리는 비로소 소유의 감옥에서 벗어나 광활한 자유를 얻습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거리를 존중하는 것처럼,
서로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는 '적당한 거리'야말로 무위의 사랑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술로서의 삶, 새로운 눈으로 보는 발견
인간의 삶은 본래가 예술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학의 긴 다리를 '불편'이 아닌 '경이'로 바라보는 눈,
하수구 틈새의 풀을 '잡초'가 아닌 '생명'으로 인식하는 눈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오늘 나는 다짐합니다.
나의 완악함으로 타인의 본성을 재단하지 않기를.
봄을 서두르지 않고, 피어야 할 때를 믿으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기를.
그리하여 나의 삶이 억지로 꾸며낸 생산물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대로 피어난 투명하고 따스한 '산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