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화마(火魔), 그리고 기록되지 못한 진실?
새로 이사 온 집 앞 야산,
평범한 산바카라길에서 나는 숨이 멎는 듯한 정지 화면을 마주했다.
숲 사이로 묵묵히 서 있는 석탑 하나. 가까이 다가가 비문에 새겨진 날짜를 읽는 순간, 잊고 살았던 1996년 4월 23일의 화마(火魔)가 내 기억의 회로를 타고 무섭게 되살아났다.
벌써 30년이다.
동두천 걸산동 밤나무골, 미군 사격장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6명 청춘의 숨을 앗아갔던 그 비극으로부터 말이다.
당시 나는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그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투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때 우연히 보았던 현장 사진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내 영혼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불과 반경 2~3m 남짓 안팎의 반경에 여섯 명의 젊은이가 모여 시커먼 재가 되어 웅크리고 있는 죽음을....
그 당시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의 머릿속엔 되묻는다.
왜 그 젊은이들은 도망칠 시간도, 저항할 기회도 없었을까?
미군 연막탄 훈련이 발단이 되었다고 기록된 산불?.
왜 그 젊은이들은 갑자기 덮친 화염 속에 고립되어야만 했을까?
지정학적 특수성과 미군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진실을 향한 목소리는 보이지 않은 거대한 정치적 압박과 서두른 장례 절차 속에 젊은 넋들의 억울함은 '순직'이라는 단어 속에 봉인되었다.
"순직"이라는 이름의 훈장이 가슴에 달렸지만, 유족들의 가슴엔 억울함이라는 대못이 박혔고, 그렇게 일곱 영혼은 세간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지워져 갔다.
추모탑 앞에는 故 이강욱 산림계장과 여섯 명의 공익근무요원의 이름이 차갑게 새겨져 있었다.
스무 살 남짓,
인생의 봄날을 제대로 만끽해보지도 못한 채 이 나라의 불길을 잡는 수호신이 되어버린 청춘들.
30년 전의 내가 그들을 위해 싸웠던 것은 그들의 죽음이 결코 '단순한 사고'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중년이 된 내가, 그들이 잠든 야산 아래로 이사를 와서 다시 그들을 마주한 것은 우연이 아닌 운명적인 '부름'처럼 느껴졌다.
"기억은 기록이 될 때 비로소 영원해진다."
추모탑의 돌을 어루만지며 예를 갖춘다.
비록 정확한 진상은 여전히 안갯속에 가려져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
"이곳은 그대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억하는 공간입니다."
30년 만에 올리는 이 늦은 추모의 글이 구천을 떠돌지 모를 억울한 영혼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빌어본다. 이제는 아픔 없는 곳에서, 화마의 공포 없는 그곳에서 부디 편안하게 쉬기를.
동두천의 맑은 하늘이 그대들의 넋을 닮아 오늘따라 시리게 푸르다.
2026년 3월 봄의 문턱에서 담우가 이 글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