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꿈을 꾸지 않는다

AI시대에 왜 글을 쓰는가

by윤슬

얼마 전, 이런 기사를 보았다.


https://newsboy.news/news/441761


요컨대 , AI로 쓴 소설이 공모전에 대거 출품되어 문학상 심사에 비상이 걸렸다는 거다.


응모된 작품 수는 예년 대비 2배 내지 3배로 폭증했고, 그 중 20~30는 AI로 쓴 소설이다.


AI덕분에 소설쓰기가 '만만'해지면서 비범한 인간들의 영역이라고만 느꼈던 창작 활동의 진입 장벽이 대폭 낮아진 것이다.


프롬프트 딸깍만으로도 그럴듯한 글이 나오니, "나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응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연유로 문학상 심사는 더욱 만만치 않은 영역이 되어 버렸다. 응모작들 중 생성형 AI가 대필해준 소설을 거르는 1차 필터링 작업이 추가되었다.


그게 아주 간혹가다 등장한다면 모르겠지만, 응모작이 1천 편이라면 그 중 200~300편은 AI 소설이니 여간 골치아프고 신경질 나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문학상 심사비가 폭증해 상의 존폐위기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작가로의 등용문은 넓어진 듯 오히려 좁아지고 있는 기분이다.


더 이상 사람들은 글을 읽지 않는데, AI 작업물은 넘쳐 흐르는 시대. 작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과 등단이나 데뷔에 대한 불안감이 밀려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AI로 쓴 소설의 저작권 문제를 논의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애초에 AI가 쓴 소설을 소설로서 인정할 수 있을까? AI가 쓴 글은 정말 글이 될 수 있는가? 대 AI 범람 시대에 인간인 내가 수제로 글을 쓰는 게 의미가 있을까?




1. AI는 소설을 쓸 수 없다.

시작부터 이렇게 단호한 소제목이라니.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확언한다. AI는 소설을 쓸 수 없다.

내가 앞서 AI 창작물이 아니라 AI 작업물이라고 한 것도 의도한 워딩이다.


이유는 이 글의 큰 제목과 같다. AI는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AI에게는 관점이 없다는 뜻이다.


관점은 세상을 자기 방식대로 보고, 왜곡하고, 편집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왜곡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나름의 재구성을 한다는 뜻이다. 이 관점은 개개인이 삶을 통과하면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AI에겐 삶이 없다. 그러니 일단 스스로 관점을 세우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야겠다'라고 결심하지 못한다.


AI의 최대 약점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라는 점이다.

하고싶은 이야기를 만드는 재료는 '욕망'과 '결핍'이다.

욕망과 결핍은 존재의 유한성을 가지고 삶을 겪어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이것이 없으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착상되지 않는다.


모든 글은 기본적으로 말을 걸기 위해서 탄생했다.

자기 자신한테 말을 걸면 일기가 되는 것이고, 세상한테 말을 걸면 칼럼이 되는 것이고, 내가 본 적 없는 세계에 말을 걸면 소설이 된다.

근데 이 말을 거는 작업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이 세상을 직접 살아가고 경험하면서 느꼈던 것들이 재조합되며 자기 안에서 창발한 결과물이다.


AI에겐 이야기를 끝까지 이끌고 가야할 명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보기에만 그럴싸한 텍스트 조합물이 되고 만다. 그래서 AI 프롬프트 딸깍으로 쓴 글은 절대 인간의 수제를 이겨낼 수 없다.


꿈을 꾸는 존재에겐 관점이 있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다. 무의식은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편집하고, 왜곡한 결과물의 저장소다.

꿈은 나의 욕망을 은연중에 반영하고, 나의 결핍을 은연중에 반영한다. 따라서 꿈에 언어라는 날개를 달아주면 하고 싶은 이야기, 즉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AI는 문장을 쓰는 존재가 될 순 있어도, 이야기하는 존재는 될 수 없다. 그러니 AI 시대에 글을 쓰는 존재는 자신만의 욕망과 결핍을 마주할 수 있는 존재들이며,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편집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AI 프롬프트 딸깍이 과연 내 글일까?


AI 프롬프트로 쓴 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내가 관점을 제시했다고 해도 결국 그 안에 쓰인 문장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AI가 그럴싸하게 늘어놓은 말일 뿐이다.


그럴싸한 결과물은 의식을 사로잡는다. 결국 거기에 현혹되어서 본래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자신만의 생각, 자신만의 관점, 자신만의 취향, 자신만의 편집이 없는 사람은 오리지널리티를 잃어간다. 주체성을 잃어간다.




3. 기술 발전 시대에 정말 힘 있는 사람은 기술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기술 발전 시대에 정말로 힘이 있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기술이 없어도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AI는 공짜가 아니다. 추가적인 비용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들이 영원할까? 데이터센터가 무너지면 글을 쓸 수 없는 인간은 그냥 쓰지 못하는 인간이다. 자기 것이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


이 추가적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앞으로 더욱 극소수가 될 것이다. AI에 기대는 인간은 비용을 두 배로 치러야 한다.


내 몸과 내 두뇌뿐 아니라 외장두뇌까지 먹여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80억 인구도 많은데, 반려 AI까지 먹여살려가면서 생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스스로 하면 되지 않을까? 곡기를 끊어 나를 죽이고 AI를 살릴 게 아니라면, 어차피 밥을 먹는 거 AI를 멈추고 그 밥심으로 내가 직접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편이 지구에도 이롭고 나 자신의 역량을 기르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4. 그럼에도 AI를 쓰는 인간들이 늘어나는 이유


인간들이 부족함, 불완전함, 본인의 미숙함을 견디지 못한다. 그건 다 경쟁슬롯 논리 때문이다.


경쟁 시대에서는 완벽함만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주입한다. 여기서 완벽함이란 어디 하나 흠집난 곳 없이 아주 매끄러운 인간, 생산을 위해 최적화된 인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산성으로 경쟁하는 시대는 이미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인간이 기계의 생산성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근대부터 지금까지는 생산하기 위해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삶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 살아야한다. 경외감을 느끼고, 감탄하고, 취향을 만들고, 공유하고, 단순히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 살아야한다.


자기 취향이 있는 사람, 하고 싶은 말이 넘쳐 흐르는 사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앞으로의 삶을 윤택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시대의 논리에 따라가기 급급해 자기 자신을 잃어간 사람은 30년 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헤맬 것이다.



AI가 모든 일을 하고, 인간은 놀고 먹기만 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전망이 판을 친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AI와 기계가 모든 것을 하게 두겠다는 발상은 지금의 착취 구조를 단지 기계에게 떠넘기겠다는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24시간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기계. 그것을 굴리기 위해서는 결국 자원의 착취가 필요하다. 자연을 소모하며 끊임없이 생산하겠다는 그 생각 자체를 뜯어 고쳐야 한다.


자본주의 슬롯가 착취하고 있는 것은 노동력만이 다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5. 자기계발서의 함정


자기계발서는 자기 자신을 강화하는 글이다.


그러나 인간의 진정한 질적 성장과 내적 성숙은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깨지고, 부딪치고, 넘어지고, 무너질 때 일어난다.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고 부화해야 한다.


안락한 공간에서 근육질 병아리로 자라봤자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빛을 본다는 것. 광명을 찾았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광명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을 때, 내가 이전과는 다른 것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을 느꼈을 때 꺼내는 단어다. 자기 안의 세계에만 갇혀 있으면 이 광명을 볼수없다. 광명은 기본적으로 익숙함에서 벗어나 경계 밖으로 발돋움할 때 마주하는 것이다.


경계를 넘도록 부추기는 것은 더 이상 나만의 세계에서 안주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은 나를 보다 매끄러운 인간으로 강화해줄 때 마주치는 게 아니라, 내가 알던 세계가 전부가 아니었다는 충격으로 내가 깨질 때만 비로소 마주칠 수 있다.


웹소설도 마찬가지로 시대의 이념과 자기 강화에 기여하는 성격의 글이다. 이는 상업적 글쓰기라는 특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런 현실이 인간성을 잃어버린 시대상의 아픔이라고 생각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qE_wJVYPKh4&t=814s

해당 영상에서 신형철 교수는 남는 콘텐츠와 휘발되는 콘텐츠의 차이에 대해 지목했다.


남는 콘텐츠는 얼음도끼 같은 역할을 하지만, 휘발되는 콘텐츠는 자기 강화를 돕는다.


더 큰 사이다, 더 맛있는 고구마, 더 격한 응보주의, 더 시원한 참교육.


이러한 것들은 결국 폭력적인 슬롯를 폭력으로 되갚는 피상적인 이야기에 그칠 뿐, 그 무엇도 바꿔주지 않는다.



웹소설은 분명 콘텐츠로서 가치가 있다. 작가가 쓰고 싶은대로 지껄이면 그만이었던 순문과는 달리, 대중들이 재밌다고 느낄 수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해서 모든 문장을 구성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팔리지 않으므로.


때문에 웹소설이야말로 정말 압축에 압축에 압축을 더한, 계산의 정점에 있는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텍스트가 오로지 현실을 바꿀 수 없는 무력한 대중들의 일장춘몽 같은 대리만족 전달에서 끝난다면, 상품은 될 수 있어도 작품은 될 수 없을 것이고, 시대의 밈은 될 수 있어도 고전은 될 수 없을 것이다.


텍스트를 읽고 쓰며 정신을 고양시키는 질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려면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고, 각자도생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싸늘한 슬롯부터 바뀌어야 할 것이다.


전쟁터에서도 시를 노래하던 그 엣날보다도 우리는 더 삭막한 삶을 살고 있다. 경쟁슬롯의 논리가 서로를, 그리고 부족한 나 자신을 기다려주지도, 견뎌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때일 수록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단단해지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과 철학이 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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