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겨울, 베이징 공항에 내린 첫날 저녁
1995년 3월,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때는 정붙일 곳이 없어서 몇몇 친구 말고는 거의 교류가 없었고 딱 내 할 일만 하며 지냈는데, 대학에 들어가자 사람이 바뀌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할 정도로 중국극연구회에 과대표에, 미친 듯이 활개치고 다녔다. 첫 여름방학은 첫 중국어 연극을 올리면서 무대감독으로 보냈다. 외고를 나왔지만 남들처럼 학원이나 과외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중국어에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원어 연극에 참여하면서도 무대 뒤로 빠진 것이었다. 빛나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무대를 만드는 쪽에 서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때 처음 배운 셈이다.
그 연극에서 배우로 섰던 C와 1996년 겨울에 한 달 반짜리 단기 어학연수를 가기로 했다. C는 그래도 중국어를 좀 했고 나는 아직 발음 기호를 배우는 수준이었으니, 의지가 됐다. 우리는 칭화대학 단기반에 신청했다. 단기연수라도 제대로 된 명문대학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해외여행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나로서는 첫 해외여행이었고, 세 살 때 제주도에 갈 때 탔다는 비행기 이후로 인생 두 번째 비행기였다. 첫 번째는 기억에 없으니 사실상 처음이었던 것이다.
베이징 공항에 내려 입국장을 지나던 첫 순간은 지금도 선명하다. 가끔 뉴스에서 북한 장면이 나오면 실제로는 컬러인데도 모든 것이 흑백 필름처럼 보이는 경험을 하는데, 베이징에 발을 내딛던 순간이 딱 그랬다. 공항 건물 안에서는 회색과 국방색과 붉은색, 그리고 가끔 파란색, 이렇게 네 가지 색만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군복을 입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다 군인이거나 군 출신이었던 것은 아니고, 두꺼운 군용 외투가 그 무렵 엄청나게 유행해서 그랬던 것이었다. 유행이라고 해서 멋진 외투를 떠올리면 안 된다. 길에서 고구마를 파는 아저씨도, 청소하는 아저씨도, 경비도, 안내데스크도, 짐 나르는 아저씨도 다 그걸 입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회색빛 베이징 시내를 한참 달린 뒤 다시 한참 시골길을 달려서, 칭화대학 칭화원에 있는 외국인 유학생 기숙사에 우리를 내려줬다. 시간이 늦어 대충 짐을 풀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는데, 아직 저녁을 먹지 않은 터라 슬슬 걸어 나와 밥을 먹기로 했다. 중국에서의 첫 끼니였다.
캠퍼스를 빠져나오니 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길이었다. 말 그대로 자동차와 우마차가 함께 다녔고, 우마차를 모는 할아버지가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길 위에 뒤섞여 있는 풍경이었다. 땅거미가 지면서 주변은 어두워지고, 흐린 백열구로 노랗게 불을 켠 단층 건물 몇 개에 식당이 있었다. 어느 곳도 위생적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원래 깔끔을 떠는 성격이 아니라 아무 데나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고 멘붕이 왔다. 손으로 쓴 네 글자짜리 요리 이름이 백몇십 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활자로 적혀 있어도 알아볼 실력이 안 되는데 손글씨라니. 중국어를 거의 못하는 나 대신 C가 자기도 뭔지 모르는 요리 두 개를 시켰다. 첫인상은 너무 짜다, 두 번째는 너무 많다, 세 번째는 너무 맛이 없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는 베이징의 유명한 요리인 징장로쓰였고, 하나는 돼지 콩팥으로 만든 요리였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중국 음식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식이지만, 그 시절 동네 식당의 맛이라는 것은 재료에 소금과 미원을 듬뿍 넣어 만든 맛이지 신경 써서 만드는 맛이 아니었다. 그 뒤로 중국 식당의 맛도 상당한 개혁개방을 거쳐서 지금은 국제적인 맛이 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열세 살에 세운 "한국의 10년 전"이라는 가설은 그날 저녁 식탁에서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우마차 위의 핸드폰을 보면 틀린 것 같기도 했다. 그 둘이 같은 길 위에 있다는 것이 중국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그 뒤로도 시간이 더 걸린 셈이다.
다음 글은 그 한 달 반 동안 칭화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권종현 · ㈜망고스타코리아 대표 · 고려대 동아시아문화산업 박사과정. 권력과 콘텐츠를 연구하며, 콘텐츠를 만들고 글로벌 AI가 K브랜드를 어떻게 읽는지 조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