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가슴속에 바다를 품고 사는 경순이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버텨내고 있는 걸까. 경순이에 비하면 내가 겪은 시련들은 사춘기 소녀의 자기 연민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그녀를 향한 호기심과 동정, 비교까지 하고 있는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 목울대로 치밀어 오르는 쓴물을 삼키며 먼 데로 시선을 던진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바카라장 끝에 삐딱하게 걸쳐 있는 자명종 시계로 눈을 돌리니 어느덧 저녁 시간을 훌쩍 넘겨 있었다.
“현조는 결혼 생각 없어?”
정적을 깨고 경순이가 물었다.
“굳이?”
내 대답에 경순이가 숨을 쉬는 것처럼 조용히 웃었다. 고요한 이 밤 그녀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헌 바카라들 사이사이 은하수처럼 흘러 다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고리타분한 옛일들을 끄집어냈다. 아마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이불 킥을 하며 후회할 말들이지만. 감성 돋는 이 밤의 분위기 때문에 입을 다물기가 싫어졌다.
“살면서 딱 한번 사랑을 해봤어. 결혼을 한다면 그 사람이랑 하고 싶었지.”
“언제였어?”
“스물넷에 만나서 딱 서른다섯에 헤어졌어.”
“예뻤겠네? 사랑을 하던 현조는.”
“예쁘기는. 찌질하고 치졸하고. 자신도 없었고.”
씁쓸하게 웃으며 식어가는 난로를 응시했다.
“거의 십 년을 바라봤어. 그 애 옆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어. 그런데 서 있더라, 다른 사람이. 점점 연락이 안 돼서 바빠 그런가 했지. 그렇게 다른 사람 옆에 서 있는 줄은 몰랐지.”
큰 눈을 깜빡거리던 경순이 목 언저리가 순식간에 단풍잎처럼 붉게 물들었다.
“너 목 왜 그래?”
“눈물 참아서 그래.”
“야 너 칠면조 같다.”
폭소를 터뜨리기에는 그녀의 눈이 너무 슬퍼 보였다. 나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그런 내 표정이 우스웠던지, 목이 벌건 경순이도 푸풉! 웃음을 뿜으며 고개를 숙였다.
“칠 칠면조....... 푸하하하하.”
어릴 적에도 우리는 별일 아닌 일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먹던 주스를 뿜고, 오줌이 나올 정도로 배를 잡고 웃었다. 열두 살, 그때처럼 우리는 바닥을 뒹굴며 배가 찢어지게 깔깔거렸다.
“그 그만 웃어. 나 나 이러다 애 나오겠어.”
“뭐? 애 애가 나와? 푸하하하하하”
간신히 멈춘 웃음을 다시 쏟아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경순아.... 슬픈 생각 해. 슬픈 생각!”
내가 먼저 잔웃음을 간신히 털어내면서 경순이를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보일러실에서 가스버너와 냄비를 찾아 꺼냈다.
“배고프다. 라면 먹을까?”
“뷔페는?”
“주말에 가자! 63 빌딩 스카이라운지도 가고!”
“그래! 그래! 스카이 라운드가 뭔진 몰라도 좋아!”
소파에 걸터앉은 경순이가 배가 땅긴다고 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으라 말하며 화목난로에 땔감을 더 넣으면서 라면 물을 올렸다. 확성기 삼총사가 번갈아가며 문을 두드릴 때마다 숨을 죽이고 구석에 몸을 숨겼다. 은근히 스릴 있고 재밌어서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 개 끓인다.”
“이 밤에?”
“허어 이경순 님 왜 이러실까? 뱃속 아기는 입 아니냐? 가슴속에 복실이도 먹어야 하고.”
“그렇네, 현조 말이 맞네.”
“집에서 만두 좀 갖고 오면 좋은데. 지금 나가면 확성기 삼총사한테 붙들리겠지?”
“응, 지금 슈퍼 앞에서 맥주 마시고 있을 거야.”
“그래? 그럼 절대 안 되지.”
나는 미니 냉장고에서 김치 통을 꺼내면서 경순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복실이 가슴에 넣고는 어떻게 살았어?”
“다방에서 일했어. 십 년은 했을 걸? 그때 두 번째 사랑을 만났지.”
“지금 애기 아빠?”
“아니? 내 두 번째 사랑은 다방손님이었어. 그 사람 일하는 공사장으로 매일 배달을 갔거든. 그러다 눈이 맞은 거지. 그 사람이랑 살고 싶어서 부산으로 도망쳤어.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작은 집을 얻었어. 우리는 눈만 마주쳐도 숨이 넘어가게 웃었어. 우리는 서로를 웃게 해 줬어. 너무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는데. 피부는 엄청 까맣고 어릴 때부터 공사장에서 일을 해서 지문도 없는 그런 남자. 뭐 지금쯤 우리 할머니 만나서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있을 거야. 더 이상 무거운 짐도 안 들고. 힘들게 막노동도 안 하고. 그렇게 두 번째 사랑을 떠나보냈어.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사고였어. 일 끝나고 바다 보러 가기로 했는데.”
슬픈 경순이가 웃는다. 나는 울고 있는데.
“그이랑 살던 집을 떠나지 않고 근처 식당에서 일을 했는데, 지금 뱃속에 있는 애기 아빠를 만났어. 일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박카스 건네주던 다정한 사람.”
“다정한 사람인데. 왜 사라진 거야.”
“사라진 거 아니야. 지금쯤 부모님 설득하고 있을 거야. 반드시 만날 거야. 만나면 지으려고 아기 태명도 안 지었는데. 현조가 지어주라!”
“흠. 한번 생각해 볼게.”
경순이는 거품을 뿜어대는 냄비 물에 라면을 넣으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프를 넣자 뜨거운 물은 화르르 끓어올랐다.
“경순아 차가운 물 부어버려!”
곧 구수하고 매큼한 향기가 바카라방 가득 퍼졌다. 허기지진 않는데, 혀 밑으로 자꾸만 침이 고였다.
“가스레인지 있는데 난로에다 궁색하게 끓여 대냐, 응?”
“라면은 난로 위에서 끓여야 제 맛이지. 우리 화목 난로는 절대 버리지 말자.”
“너 아기 낳으면, 화목난로에 낭만을 알려줘야겠구먼?”
경순이가 까르륵 웃는 순간, 냄비 속 국물이 넘칠 듯 다시 끓어올랐다. 나는 뒤로 넘어가는 경순이를 붙잡고, 라면 물에 입김을 호호 불어 식혔다.
“넌 왜 그렇게 시시껄렁한 것에도 까르륵거리냐?”
“현조가 재밌어서. 너만 보면 웃겨.”
"참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괜스레 투덜거렸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지만, 난로의 온기와 헌바카라방을 감싸는 노란 조명 아래서 우리의 대화는 식을 줄을 몰랐다. 오히려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활활 타올랐다.
“가을이 할머니 자주 오시라 그래.”
“현조 불편하잖아.”
“다 이해할게. 난 한다면 해.”
경순이 송아지 눈에 물이 맺힌다. 저러다 눈물샘이 터질 게 뻔해서 화제를 돌렸다.
“나비 왔나?”
“집으로 들어가는 거 봤어.”
“나비 걔. 괜히 은혜 갚는다고. 쥐새끼 같은 거 물어오지 말라 해라!”
“밥 주면서 당부한다고! 쥐 물어오는 날, 너는 쫓겨난다고.”
“알아듣디?”
“그럼 얼마나 영특한데.”
고단함도 없이 밤에 취한 우리는 라면 국물까지 싹싹 비워내고 우엉티백을 찻잔에 우렸다. 구수한 향기가 코밑까지 타고 올라왔다.
“현조! 5학년때 반장이 우리 무시하고 따돌리고 그랬잖니? 조모임 할 때도 우리는 빼버리고 말이야.”
“어린애가 왜 그렇게 못됐나 싶어. 자기들 소지품 내 서랍에 넣어두고는 도둑맞았다고 담임한테 일렀던 거 기억나? 그때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울었는지 모르겠어. 열받아. 그래도 경순이 네가 복수해 줬잖아.”
“운동회 날? 콩 주머니로 뒤통수 때린 거?”
“아니 아니! 그거 말고. 간장 사건!”
“간장?”
“도시락 간장 테러 사건!”
“아! 아아아! 아아!”
거대한 유적지를 발견한 탐험가라도 되듯이 탄성을 내지르는 이경순이다.
“그걸 까먹냐? 엉? 그걸 까먹어?”
사사건건 못살게 구는 반장 무리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은 우리는, 체육 시간에 몰래 교실에 들어가 반장 도시락통에 간장을 붓는 작전을 짰다. 당하고만 사는 우리가 하늘도 안쓰러웠는지, 그날 담임이 집안 사정으로 결근했고 체육 시간에는 자유 피구 대회가 열렸다. 존재감 없던 우리는 그 소란스러운 틈을 타 조용히 교실로 숨어 들어가 소윤혜 무리 도시락에 간장을 부었다. 드디어 점심시간! 우리는 숨을 죽이며 반장 무리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얄미운 반장이 맛있다며 밥을 허겁지겁 먹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아침에 냉장고에서 꺼내온 간장은 엄마와 같이 청소일을 하는 동료가 도토리가루를 줘서 도토리묵이랑 먹으려고 달래까지 찹찹 다져서 만든 귀한 양념간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간장테러 작전은 보기 좋게 실패했고, 내 덕에 간장 비빔밥에 맛을 들인 반장은 종종 양념간장을 싸와 치즈랑 비벼먹었다.
“푸하하하, 그날 너 어머님한테 엄청 맞아서, 우리 집에 피신해온 거 기억나!”
“진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았지.”
그런데 그날 밤, 진짜로 폭우가 내렸다. 경순이 할머니 품에 안겨 울고 있는 나를 데리러 온 아빠가 슈퍼 앞에 앉아서 하드 하나 쥐어주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비는 쏟아지고, 울음은 안 멈추고, 아빠가 사준 아까운 빵파레는 손에서 녹아 흐르고.
"그때 엄마아빠 나이가 되었네...."
"그렇네. 우리 아빠도 살아계셨으면 좋았을 것 같아."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어릴 때, 돌아가셨다는 부친을 이야기하는 경순이 눈이 반짝거렸다.
"어머님 소식은 몰라?"
"응...
경순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을 나갔다는 모친에 대한 이야기에는 말을 아끼는 경순이었다. 모친에 대해 괜히 물었다, 후회를 하며 우엉차가 든 컵을 휘휘 돌렸다.
"우리 엄마 발레리나였데."
"정말?"
속으로 경순이 어린 시절 형편과 발레리나 엄마는 어울리질 않아, 나도 모르게 의문을 던졌다. 이 반응 역시 후회다. 수습을 하려는 심산으로 빠르게 말했다.
"경순이 너 예쁘잖아. 발레리나 엄마를 닮았나 봐."
"응, 할머니가 그랬어. 엄마 이뻤다고. 사슴 같았다고."
자신 있는 표정을 짓던 경순이가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경순아 다시 공부해 볼래? 검정고시도 있고. 공부 잘할 것 같은데.”
“현조야... 5학년 때 칠판 앞에서 선생님한테 뺨 맞는 멤버 중에 나도 있었어.”
“맞다. 공부 못하는 애들만 칠판 앞에 나갔지?”
우리는 또다시 동시에 와하하하, 웃어버렸다. 경순이는 배가 땅기는지 아랫배를 움켜쥐고 악악 거리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우리의 파안대소를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저곳은 바카라방인가 귀곡산장인가 의심할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아픈 기억도 이제는 이렇게 웃어넘길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야야 그러다 애 놀란다.”
힘들어하며 배를 잡는 경순이를 말리면서, 웃음을 삼켰다.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계속 저렇게 웃다가는 애가 지금이라도 까꿍, 하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바카라방에서 애를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경순아. 임신하면, 뭐 막 먹고 싶고 그런다며? 신거 먹고 싶고 안 그래?”
남아있는 웃음기를 가다듬으며, 경순이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 이내, 보리차라고 답했다.
“차가운 보리차, 델몬트 주스 유리병 생각나?”
“그 시절 어머님들의 주전자였지.”
“그 주스 병에 담긴 보리차가 그렇게 마시고 싶어. 할머니가 꼭 주스 병에 보리차를 담아놨거든. 근데 주스를 마셔 본 기억은 없어.”
“인터넷에 주스병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88 올림픽 열쇠고리도 팔더라. 우리 집에도 찾아보면 호돌이 그려진 티스푼 있을 거야. 경순아 갑자기, 오렌지 주스가 마시고 싶은데?”
“사러 가자.”
우리는 편의점을 가기 위해 바카라방을 나와 밤길을 걸었다. 밤공기 속에는 어렴풋한 봄기운 어린 흙내음이 배어 있었다. 알싸한 꽃향기도 나는 것 같고.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간, 가로등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고즈넉한 길은 이상할 만큼 평안했다. 가로등 불빛은 안개처럼 번져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는 것만 같았다. 달빛에 잠긴 가로수 아래, 한 박자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아무 말 없이 걸어도 편했다.
“경순아 봄 되면 밤마다 산바카라하자. 봄밤에는 유난히 공기가 달콤하거든.”
“여름밤에도 걷자.”
“에잇! 사계절 내내 밤마다 걷자!
시간이 지나면, 어떤 건 사진처럼 장면만 남기도하고, 어떤 건 향기만 또렷하게 남아 맨가슴을 아릿하게 만든다. 경순이와 걸은 오늘의 이 길은 공기, 온도, 습도까지도 고스란히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간절히 남기고 싶었다.
“2020년도 3월 30일 새벽 한 시 반. 기억해.”
고요한 밤, 불쑥 스마트 알림처럼 날짜와 시간을 외치자, 경순이가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약속해, 가끔 서로가 미워지면, 오늘 밤을 생각하면서 용서해 주기로.”
경순이는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분 좋게 봄밤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현조야, 아무도 없는 밤에 걸으니까 꼭 그때 같다. 우리 어릴 때, 사이렌 같은 거 울리면, 그 자리에서 걸음 멈추거나, 어디 들어가서 얼음! 했어야 했잖아.”
“아 민방위훈련?”
“응 그거! 나 그때, 똥 마려워서 집에 급하게 가는데, 하필이면 사이렌 걸려서, 어떤 상가 들어가서 막 다리 비비 꼬고 그랬어. 기억나?”
“어우 기억하다마다. 근데 사람들은 민방위훈련 참 싫어했는데, 나는 좋았어.”
“왜?”
“그냥, 세상이 잠시 멈췄잖아. 쌩쌩 달리던 차도 멈추고,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도 멈추고, 시끄러운 세상도 조용해지고. 그럴 때 이상하게 자유를 느꼈어.”
“역시 비범해. 우리 아기가 현조 닮으면 좋겠어.”
“에엥? 말도 안 되는! 절대 나 닮으면 안 되지!”
“아 왜? 아기야~ 현조 닮아라!”
달 밝은 밤, 우리는 춤을 추듯 옥신각신하며 거리를 걸었다. 편의점을 지나쳤지만, 누구 하나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낄낄대다가 소곤대다가 까르륵 넘어갔다.
“가을 할머니 보면, 할머니 생각나서 안 슬퍼?”
“할머니 생각나서 좋아. 그런데 쥐를 보면 슬퍼져.”
“애액!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야?”
“남해 친척집에서 일해줄 때 창고에서 살았다고 했잖아. 그때 창고를 꾸민다고 벽에 그림도 그려 붙이고 그랬거든? 할머니랑 있는 동안은 좀 살만하게 꾸미고 싶었거든. 어느 날 자다가 눈을 떴는데 할머니는 벌써 생선 말리러 덕장 가고 없는데. 코앞에서 쥐가 새끼를 낳고 있더라?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말이야.”
나는 마치 바로 앞에 쥐라도 있는 듯 몸서리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땅에 비친 박현조의 그림자는 과장된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 일 인극을 열연으로 펼치고 있었다. 경순이는 말을 하다 말고, 내 그림자를 가리키며 배를 잡고 웃었다.
“미안미안, 그래서 어떻게 됐어?”
별안간 아랫배를 감싸 쥔 경순이가 짧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허리를 숙였다. 나는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문이 닫혀 어둑한 슈퍼 앞으로 부축해 평상 위에 앉히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경순이는 잠시 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놀라 비명도 못 지르고 속옷 바람으로 도망쳤거든? 그런데 살면서 문득문득 생각이 나. 그 어미 쥐의 눈빛이 말이야. 어떻게든 새끼를 지키겠다는 그 결연한 눈빛이. 어떻게든 새끼를 보호하겠다는 그 의지가 담긴 눈길이. 그래서 할머니한테 쥐가 새끼를 났으니 죽여 달라는 말을 못 했어.”
카디건 위에 내가 준 패딩 조끼까지 겹쳐 입은 경순이는 별로 춥지도 않은데 자꾸만 손을 떨었다.
“나는 쥐..”
“뭐라고?”
경순이의 그림자는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그림자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다시 물었다.
“아까 뭐라고 했어?”
“나는....... 쥐보다도 못하다고.......”
# 작은 에필로그
[1년 뒤, 미래의 어느 날 너를 그리며 쓴 일기]
문득문득. 아니 자주. 후회를 한다. 달무리가 하늘 가득 퍼지던 그 밤. 얇은 너의 몸을 안고서 네 가슴에 고인 바닷물이 넘쳐흐를 때까지 끌어안지 못한 걸. 너와의 여름방학이 계속될 줄 알았던 열두 살 그때처럼 너와의 이상한 동거가 영원할 줄만 알았으니까. 이토록 사무치게 아프리라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안아주고 또 안아주고. 새겨듣고 또 새겨듣고. 위로하고 또 위로할 것을. 눈물 많은 너를. 남의 일에는 작은 것에도 통곡을 하는 너를. 자신의 고단함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너를 위해 펑펑 울어 줄 것을. 미치게 후회할 날이 올 걸 알았더라면 눈자욱이 짓무를 만큼 울어줄 것을. 이토록 휘청 일 만큼 그리울 줄 알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