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턴'(2026) 리뷰 혹은 후기
영화 전체에 대한 감상이나 만족도 등과는 별개로, 특정한 인물/배역에 마음이 쓰이고 생각이 계속해서 머무르는 경우가 있다. 최근 내게는 영화 <인턴>(2026)에서 박예니 배우가 연기한 우투투(Woo22)의 MD '서유진'이 그랬다. 작중 기호(최민식)를 비롯한 인턴들이 처음 출근했을 때, (마침 자리에 없던 민아(류혜영)를 대신해) 회사 여기저기를 소개해준, 기호에게는 회사의 첫 얼굴들 중 하나였던 인물. 경영지원실의 민아 못지않게 MD 일을 하는 유진 역시 언뜻 봐도 바빠 보인다. 게다가 MD팀장인 준형(임성균)은 사사건건 유진의 역할과 공로를 가로채거나 자신에게 내려온 일을 유진에게 떠넘기기도 한다.
조연 중 한 명인 유진의 일과를 <인턴>이 하나하나 묘사하거나 언급하지는 않기에 전부 헤아릴 순 없겠으나, 탕비실에서 동료인 민아에게 스트레스를 토로하는 장면 등만 봐도 유진 역시 우투투에서 자신만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3년 만에 급격히 성장한 회사에서, 선우(한소희)만 바쁜 게 아니다. 많은 이들에게 업무 과부하가 걸려 있으리라는 건 엘리베이터 앞 의자에 한가득 쌓이는 각종 의류 샘플이나 집기들만 봐도 훤하다.
흔히 회사에서 경영진의 눈에 들거나 자기 존재감을 뽐낼 수 있으리라고 짐작하는 유형의 사람들은 성과를 자랑하는 데 적극적이거나, 얼핏 중요도가 높이보이는 큰 일의 주역이 되거나, 혹은 단순히 임원의 눈에 든 사람인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회사를 실제로 움직이거나 큰일이 생겼을 때 문제없도록 지탱해 주는 중요한 사람들일수록, 평소에는 그 기여도를 주변에서 잘 모르기 마련인 것 같다. 플래그십 스토어의 오픈 파티를 개최하거나 일본 백화점 입점 딜을 성사시키는 것과 같은 겉보기에 중요하거나 전략적인 프로젝트만 업무가 아니라는 건 회사 생활을 제대로 해 본 이들이라면 알 것.
유진은 자신이 준비해서 성사를 목전에 둔 백화점 입점 딜을 팀장이 자기 공로인 것처럼 대표에게 보고하는 걸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으면서도, 플래그십 스토어 내 가구 배치나 의류 디스플레이를 기획회의 전까지 직접 방문해서 점검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일단은'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찾으려 하는 사람이다. 외근 후 바로 퇴근하지 않고 늦은 저녁 시간 사무실에 돌아와 제 일을 하는 사람. 기호에게 유진은 "저는 아직 멀은 것 같아요"라고 자조하지만, 기호는 "유진님은 크게 될 겁니다, 제가 보면 압니다"라고 추켜세운다.
그런 유진의 사정을 기호는 일찍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원작 <인턴>(2015)의 벤(로버트 드 니로)이 그런 것처럼, 기호 또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뛰어난 관찰력(Observant)을 가진 인물이다. 안이 들여다보이는 대표실이나 회의실의 사람들을 풍경처럼 언뜻 관찰하다 보면 기호에게는 누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구나, 하는 게 간파된다. 기호는 선뜻 나서서 "제가 가드릴까요?"라고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유진은 연신 양손을 모으며 기호가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임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 <인턴>(2026)의 중후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턴>에서 마음에 남는 순간들은 주로 그런 것들이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기꺼이 호의로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거기 임하며 도움을 받는 사람은 명시적인 언어로 고마움을 표시해 준다. 일이라는 건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혼자 힘만으로는 해낼 수 없고 협업해야 하거나 사내 유관부서 또는 협력사 누군가의 조력을 받아야만 완수되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내게 주어진, 하기 싫어도 해야 하거나 일단은 달리 어쩔 수가 없는 산재한 일들을 하나씩 해치우면서. 견디면서 기회를 차근차근 노린다. 싫은 사람에게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다. 유진은 그런 사람처럼 보여서 영화 내내 기호나 선우보다도 더 마음이 쓰였다.
영화 중후반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유진은 기호에게 "칭찬이나 찬사 뭐 그런 거 해주시면 안 돼요?"라며 일의 고단을 숨기지 않는 대목이 그래서 <인턴>에서 가장 오랜 잔상으로 남았다. 기호는 제 친구들 중 절반은 과로사로 죽었다고 칭찬해 달란 말에 "과로하면 죽어요"라고 자조적인 농담으로 말을 연 뒤 "유진님은 크게 될 겁니다"라고 진심 어린 응원을 보탠다.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해줬다면 유진에게 그만큼의 위안이 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좋아하는 믿음직한 사람인 기호여서. 야근하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하며 각자의 일로 돌아간다.
원작에서와는 달리 부대표인 구영환(김준한)이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는 일 등에서 선우와 이견과 갈등을 빚으며 영화 최후반부 회사에서 물러나게 된다. 공석이 된 부대표의 자리를 선우는 유진에게 맡긴다. 전 직원이 보는 자리에서. "서유진 씨, 앞으로 한 달간 부대표로서 업무 파악하세요." 인정받을 만한 공로와 역량을 내보인 이가 창업자이자 대표이사로부터 공식적,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순간이 내게는 영화 전체에 대한 인상과 여운에 영향을 줄 만큼 뭉클했다. 조용히 제 일을 하는 사람이 조용하지 않은 방식으로 치하받는 순간. 그런 순간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더 많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평범한 순간에도 신의와 소명을 다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일은 모두에게 하기 싫은 것이고 나보다 남이 잘 되거나 인정받으면 배가 아프다. 그렇지만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조금 참으며 결국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인정해 주고 위로해 주고 축하해 주는 것, 그런 마음은 슬롯 구성원 모두를 기분 좋게 만들 것이다. 그건 인턴에게도 대표이사에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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