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말해왔던 이야기지만,
모든 사람의 모든 판단과 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전부 다 존중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그랬다. 취향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방식과 타인(과 타인의 취향)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다. 존중하려 들지 않는 사람의 의견과 생각을, 헤아려야 하는 일은 늘 난제였다. 존중은 진정 받을 가치가 있는 이에게만 더 마땅히 행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지 않을까, 배제해야 한다고 믿어지는 것에 대해 단호히 그리해야 하지 않을까. 어쩐지, 적어도 온라인에서는 요즘 사람들은 취향 존중을 틀리거나 이상한 의미로 쓰고 있는 게 분명하게 느껴진다. 최근 기대감과 화제성이 높았던 나홍진 감독의 신작 영화 <호프>(2026)가 개봉하고 난 뒤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그 영화에 제법 높은 별점(5점 만점에 4점)을 준 일이 화제가 됐다. ('화제'란 표현은 순화한 것이다) 왓챠피디아를 포함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모든 부정적 반응들은 단 한 줄로 축약 가능하다. "아니 이런 영화를 좋게 평가한다고?"
그들은 평론가가 감독과 친분이 있냐고, 한국영화 산업의 부흥을 의식해 별점을 반 개 더 준 거냐고, 플러스엠(배급사)이 속한 모 기업의 사정 때문이냐고, 언택트톡 행사를 해야 하기 (+돈을 받기) 때문에 좋게 평가해 주는 거냐고, 잣대가 이중적이라고, 직업의식과 윤리와 한 사람의 살아온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고 평가했다. 저 무지에 가까운 리액션(별로 '의견'이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에 대해, 십수 년 전부터 여러 차례 그래왔듯 평론가는 블로그에 또 긴 글을 썼다. 조목조목, 그러나 차분하게 반박했다. 전체의 핵심은 이것으로 발췌할 수 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당신은 그냥 그렇게 보고 싶어서 줄기차게 그냥 그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그냥 당신이 싫어하는 영화를 제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듣기 싫을 뿐입니다." 내게 이건 거의 올해의 가장 적확한 문장이다. 영화를 넘어 오늘날 슬롯문화적 현상 거의 전부에 가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문제는 그들 대부분은 해당 평론가의 긴 글이나 영상(유튜브 채널)이나 관객과의 대화(GV) 어디든 찾아보지 않는 자일 공산이 크다는 것. 그들은 <호프>를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고 또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나서듯 다른 것에 대해 비슷한 댓글을 남길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알고 믿고 읽고 써 온 한에서, 크고 작은 계기로 만나고 대화해 온 영화 기자와 평론가들을 사람이자 직업인으로서 떠올린다면, 영화비평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일말의 이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상술한 리액션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오직 숫자(별점)에만 반응할 뿐이다. 비단 유명 영화평론가의 문제일까? [씨네21] 같은 영화 전문 매체의 평점과 20자 평에 대해서도 (역시 온라인의) 사람들은 함부로 반응해 왔다. 한때 도저히 간과하고 싶지 않아 몇몇 사람들에게는 긴 반박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 역시 강하게 날 선 단어를 서슴지 않았다.
그들에게선 한결같이 '선민의식', '저널리즘의 역할', '평론가의 자질', '유명 평론가는 대중들의 취향에 부합해야 한다', '가르치려 든다'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심지어 '있어 보이는', '그럴싸한' 말들로 평론가가 영화를 포장하거나 대중의 기호를 외면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과연 자신이 쓰는 단어들의 의미를, 비평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는 말이었을까? 사람들은 문화예술에 어떤 정답에 가까운 객관의 영역이 있다고 착각해 버리는 것을 넘어 타인의 주관을 보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는다. '논란'이 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에 대해 손쉽게 화를 낸다. 그렇게 떠들썩했던 영화들의 제목 십수 편을 곧장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다. 불특정 다수의 군중이 학습, 성찰하지 않은 채 모이는 공간은 그저 감정 배설, 유희, 조롱의 놀이터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거기엔 생각이 설 자리가 없다.
나름대로 오래 지켜봐 온 바, 저 현상은 대략 이런 것들에서 기인하는 듯 보인다. 하나, 리뷰와 비평에 관한 몰이해가 있다. 리뷰는 가이드로서의 참고 지표가 될 수 있겠지만 비평은 전적으로 비평가 본인 주관에 깊이 천착하고 그로부터 발생한 미학적, 윤리적 질문에 대해 치열하게 사고하고 응답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별점과 한줄평만 보고 그것을 비평의 전부로 취급한다. 여기서 나아가 둘, 지명도가 있는 비평가를 자신의 취향을 설명 또는 대변해줘야 할 서비스업 종사자처럼 인식한다. 셋, 서로 다른 관점과 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르거나 타인의 의도를 선의로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넷. 셋의 연장선에서 온라인상에서 그저 만만한 유명인에게 불만을 쏟아낸다(나는 연예인을 포함한 유명인이 아주 많은 경우 불특정 다수의 대중들에게 있어서 타깃이 되는 약자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다섯. 비평가의 코멘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은 아주 올바르고 합리적인 소비자의 마땅한 권리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서 거기에 대해 한계점이나 논리상 부족한 점을 지적하면 견디지 못한다. '비싼' 티켓값을 내고 영화를 봤으니 자신과 다른 평가를 한 사람에 대해서 화를 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선민의식' 같은 단어를 쓰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내 오프라인 생활 반경에서도 멀리해야겠다는 확신 비슷한 걸 얻게 됐다. 가만 보면 그들은 매체의 공신력이나 평론가의 지명도를 자신의 취향, 감상을 정당화하거나 충족시켜 주는 쪽으로 이용하고 싶었던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들에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은 적이다. 내가 재미없게 본 영화를 누군가 재밌게 보고 호평했다고 해서 내 안목이 뒤떨어지는 것이 되는 게 아니다. 천만 관객이 본 영화를 평단에서 혹평한다고 해도 나는 그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 될 수 있다. 한국 슬롯 특유의 집단적, 통제적 특징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비평과 저널리즘을 업으로 삼은 이들의 고단한 마감과 직업 자체를 폄하한다. "20자 평과 별점은 영화 기자들이 모든 일을 마치고 붙이는 추신에 불과하니 영화 저널리즘을 그것과 동일시하지 말아 주세요"(김혜리)라고 했건만, 직업인으로서의 전문 관객이 제 소신과 주관과 시간을 걸고 적어낸 이야기를 그들은 읽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인과관계를 만들어 자신이 힐난한 그 영화를 비평가와 저널리즘이 띄워준다고까지 단정해버린다.
영화 글을 십삼 년 간 썼다. 일개 블로그를 시작으로 영화를 전문으로 다루던 월간지 객원 에디터 생활을 거쳐 영화 홍보, 마케팅, 배급에 종사했고 인스타그램, 온라인카지노에 영화와 관련한 무언가를 기록하고 외부 지면이나 온라인에 정기/비정기 기고를 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글쓰기에 대해 말해달라는 청을 받아 온오프라인 여러 자리에 출강도 했다. 작은 평론 공모전에서 작은 상을 받은 적도 있지만 스스로를 단 한 번도 비평가라고는 칭해본 적 없다. 보다 치열하게 비평하고 영화의 잔영을 다시 꼼꼼히 보는 수많은 베테랑 평자들에 비하면 나는 영화 조금 아는 글 조금 쓸 줄 아는 사람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낮잡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말하겠지. 평론가가 욕먹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자기 일도 아닌데 뭘 그렇게 열을 내냐고. <호프>를 관람하기 전날, 나는 아래와 같은 짤막한 기록(일부 발췌)을 일기처럼 남겼다. 열네 개의 번호를 붙여가며 일목요연하고 정확하게 의견을 적어 내려 간 평론가의 어느 밤을 생각하자면 내 일처럼 화가 났기 때문이다.
"읽으려고도 하지 않고 더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는 저들의 무례함과 좁은 식견이 감탄스럽게도 싫다. 새삼스럽지도 않게 싫다. 정작 저런 리액션을 어떤 고민도 없이 지껄이는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텐데 생각을 평소에 아주 많이 하는 사람은 어떤 현상에 대해 더더욱 오래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무언가를 남기고 공유하고 이야기한다. 그래도 저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 어떤 의견에 대해 선해할 줄 알고 그럴 수 있구나 여길 줄 아는 건 인간의 기본적인 자질임을 넘어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태도에 가깝다고 아주 단호하게 믿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 쓸수록 나는 (...) '저런 사람들'에 대해 더더욱 선을 긋게 된다. 나는 절대 저런 인간은 안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거야말로 진정 Hopeless 한 일일 거라고."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한 사람은 싫다"라는 표현을 쓰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쪽이기도 하다. 무슨 이야길 해도 되는 가깝고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특정한 사람이나 가치관을 향한 싫음의 표현은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한다고까지 믿는달까. 어떤 가치나 지향, 의견에 대해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거나 자신은 이렇게 생각한다 말하는 것과, 자신은 (자신과 다른 편에 있는) 그런 게 "싫다"라고 꼬집는 건 굉장히 다른 의미와 맥락을 갖기 때문이다. 여느 소수 또는 다수의 그룹에서, 온오프라인에서, 특정한 집단에서, 나는 쉽게 어떤 것이/누군가가 싫다고 말하는 걸 정말 자주 목격한다. 그 싫음의 대상은 자신의 말을 바로 앞에서 듣는 상대방일 수도 있고, '그런 뜻이 아니었다'라고 하는 항변은 발화된 순간 이미 힘을 잃는다. 곁에 있는 사람의 말도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다. 그럴 때 나는 그가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꺼냈는지 한 번 더 헤아리려 한다. 그건 내가 그 사람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 지근거리에 있지 않은 흐릿한 익명에 대해서라면 어떨까? 비평하는 일이 신의와 예의를 갖춰 대상을 오래 목격하는 일이라면 그 선해의 렌즈는 존중받을 만하다고 믿는 쪽으로 편협하게 초점을 맞춘다.
이동진 평론가의 글에서 내가 한동안 멈춰 있던 문장은 따로 있었다. 앞에서 인용한 대목이 올해의 문장 정도라면 이건 어쩌면 살아갈 날들에 만날 영화들 전체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를 말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영화관과 세계관 뿐만 아니라 이제껏 살아온 우리의 삶 전체를 끌어와서 우리 앞에 놓인 단 한 편의 영화를 봅니다." 한 사람의 관객이 크고 어두운 상영관에서 낯선 영화를 만나는 일은 꼭 저 말처럼 자기 삶을 함께 데려가는 일이다. 어떤 감독의 신작을 볼 때 그 사람의 작품 세계와 소재, 장르 등에 대한 관객 자신의 선험과 기대와 우려가 개입한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름이 크레딧에 올라가 있다면 얼마나 새로운 체험을 안고 나오게 될지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는다. 동반인이 있다면 내 옆자리의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며 이 영화를 볼까 궁금히 여긴다. 비평가 역시 관객이자 개인이다. 오히려 비평을 업으로 삼아 살아남은 이들은 늘 자신이 욕을 먹는 자리에 있다는 걸 누구보다 체화해서 안다. 자신이 무언가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두려워하고, 생각을 온전히 실어 나르지 못하는 미문 앞에서 작아지고, 저널리즘이 특권이 되지 않도록 점검하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비평가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다.
좋은 쪽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쓰고 말하길 선택하려 한다. (굳이 적시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전제이지만 어떤 것을 일부러 더 좋게 봐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안 좋은 이야기를 할 때는 그만큼 더 오래 생각할 필요가 있고, 나는 항상 스크린 속 결과물 뒤의 보이지 않는 땀과 좌절과 스트레스도 헤아릴 줄 알고 싶다. 두 시간짜리 장편 영화 하나에 몇 년이, 수 천 명이 투입되지만 저 공동의 노력을 깨부수는 데에는 2분, 아니 2초도 걸리지 않는다. 의견과 평가를 가장한 비난과 조롱에 맞서, 내가 할 일은 오히려 더 주관적으로 웃고 당황하고 흔들리고 탄복하고 울었던 마음을 1분이라도 더 생각하고 다듬어 정리하는 것. 그리하여 영화에서 무엇을 얻어내고 발견했는지 있는 힘껏 생생히 전하고 싶다.
읽고 쓰는 사람의 자의식에 기반한 너무 뻔한 결론 내지 판단일까. 익명 뒤의 숨은 자들이 무례와 무지를 당당한 취향이자 쿨함 같은 것으로 포장하는 걸 도무지 견딜 수 없다. 다름을 보려 하지 않는 둔감한 태도는 자랑이 될 수 없다. 다른 생각을 가진 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순간 그의 세계는 더 이상 넓어질 수 없다. 나는 그런 이들의 삶은 궁금하지 않다. 의견을 가장한 비난과 적대에 대해 나는 얼마든지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다. 나는 실체 없는 대중, 군중보다 알고 믿고 봐 온 '사람'의 편에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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