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문제

by김동진

셋 셀 동안 대답해. 가위 바위 보, 아침 점심 저녁. 빛의 삼원색, 색의 삼원색. 또 뭐가 있을까. 카메라를 안정적으로 떠받쳐 특히 야간 사진 촬영에는 필수인 삼각대까지. 3이란 일상에서 종종 이상적인 것이거나 무언가의 기준점이 되는 숫자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반면 물리학, 특히 카오스 이론에서는 3이 안정과는 거리가 먼 혼돈의 숫자에 가깝다고 한다. 변수가 둘일 때와 달리 셋 이상일 때부터는 계산이 상상 이상으로 까다로워진다는 것이다. 점이 두 개라면 선 밖에는 만들지 못하지만 셋이 되면 면이 생겨서 그런가. 삶은 선이 아니라 면이라던데. 이 글을 쓰는 지금을 빚어낸, 살아온 생의 가늠할 수 없는 복잡성에 대해 아스라히 생각한다. 안정적인 것 같지만 한없이 불완전하고 예측불가능한 토대를.


Max Richter - 'Dream 3(in the midst of my life)'

https://www.youtube.com/watch?v=AwpWZVG5SsQ



3과 삶을 생각할 때면 류츠신 소설 『삼체』(2008)와 그를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삼체](2024)의 주된 설정 기반인 '삼체문제(Three-body Problem)'가 떠오른다. 세 개의 물체가 서로를 끌어당기며 움직일 때, 어떤 조건에서든 셋의 질량과 속도를 계산하기 위해 항상 써먹을 수 있는 공식, 그러니까 일반해는 수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훗날 극히 제한된 일부 조건에서만 성립하는 특수해가 몇 가지 알려졌지만, 일반해를 유한한 항으로 구할 수 없다는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의 증명은 1887년 이래 바뀌지 않았다. [삼체] 속 삼체인은 항성(태양)이 셋인 항성계에 산다. 그래서 자신들의 하늘에 언제 태양이 몇 개 떠오를지, 혹한과 혹서가 닥쳐올지 예측할 수 없다. 계절과 기후가 주기성을 잃은 혼돈의 세계에서, 이들은 지진이나 폭풍 등의 재해나 극단적 기후 변화가 닥쳤을 때를 버티기 위해 몸을 탈수시켜 껍데기만 남기는 기괴한 생존법을 터득하며 문명을 이어온다. 지구인 모두를 간단히 멸종시킬 만큼의 가공할 기술력을 이룩하더라도 삼체문제만큼은 해결할 수 없기에 그들이 사는 문명은 아주 운이 좋아도 언젠가는 폐허가 된다. 그 어떤 대비도 종래에는 완전해질 수 없는 세계에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 생의 감각을 가늠할 수 있게 끄집어내려면 작중 삼체인은 물론 지구인 이야기도 같이 해야 하는데 이해를 위해 [삼체]의 토대를 조금 더 풀어보면 이렇다.


1960년대 지구. 물리학 교수였던 예원제의 아버지 예저타이는 상대성 이론과 빅뱅 이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만으로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목숨을 잃는다. 이를 지켜본 예원제의 젊은 날은 분쟁과 전쟁, 환경 파괴를 일삼는 인류에 대한 절망으로 가득해졌고, 그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으며 인간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몇 년 뒤 전파를 연구하는 군사 기지에서 일하던 그는 태양을 이용해 지구의 전파를 우주로 증폭해 보내는 방법을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외계를 향해 신호를 쏘아 보낸다. 어느 날 알파 센타우리 항성계의 삼체인으로부터 회신이 도착한다. "회신하지 마라. 우리가 너희의 위치를 알고 찾아갈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던 예원제는 "이 세계는 자구력을 잃었다. 오면 지구의 점령을 돕겠다"며 좌표를 포함해 답신해 버린다. 그 결과 삼체 문명은 지구로 향하는 함대를 출발시키고, 훗날 인류는 길어도 약 400년 안에 그들이 도착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홍위병들은 과학자 한 사람을 죽인 일이 몇 세기 뒤 지구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예정된 침략이 현대 인류의 수명보다 몇 배는 더 머나먼 미래에 벌어진다는 점이다. 죽고 난 뒤의 세계가 한 번 더 죽을 것이라는 카운트다운을 두고, 눈앞의 지금밖에는 살 수 없는 사람이 과연 어떻게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삼체인은 예측 불가능한 세 개의 태양이 빚어낼 재앙을 피해 안정적인 태양계로 넘어오려 하고, 지구인들은 밑그림조차 그리기 어려운 수 세기 뒤의 미래를 위해 오늘의 세계를 지켜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앞으로 60~70년쯤 살 사람에게 400년 뒤의 위협에 맞설 방도를 고안해 보라 한다면 가능할까. 지구 전체가 미래의 죽음을 미리 통보받은 세계의 풍경은 절박함과 냉소, 허무주의와 뜻 모를 의지, 한철의 사랑과 안간힘이 뒤섞인 수십 억 가지 양상으로 펼쳐진다.


삼체인은 지자라는 이름의, 소립자 크기의 양성자 컴퓨터를 지구에 은밀히 보내 과학기술 연구를 감시하고 교란하기 시작한다. 지자는 양자 얽힘 현상을 이용해 삼체인과 실시간 교신이 가능하며, 함대보다 훨씬 먼저 지구에 도달해 있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술로 감각과 관측 장비를 교란하고,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거나 실험 결과를 왜곡하며 기초과학의 발전 자체를 방해한다. 나아가 지구 전체의 전광판에 "너희는 벌레다"라는 문구를 띄우며 선전포고하기에 이른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 어차피 몇 백 년 뒤의 일이라며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 삼체인을 구원자로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계 각국은 개별 국가 차원의 대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그 결과 먼 미래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연합기구인 행성방위이슬롯가 수립된다. 어떤 세계에서도 그 누군가는 거시적 차원의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분투한다.



픽션 속 인물을 포함해 다른 누군가로 살아볼 수 있다면 어떻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그때 무의식 중에 떠오른 게 삼체인이었다. 아무리 계산해도 언젠가는 터전을 잃고야 마는 세계에서 간신히 문명을 지탱하며 멸망을 예비하는 삶이란 어떤 걸까 생각하면 짐작할 수도 없이 아득해져 하루라도 살아보면 조금이나마 알까 싶었다. [삼체] 속 삼체문제는 엄밀하게는 세 항성만이 아니라 삼체인이 사는 행성도 고려해야 하므로 삼체문제 이상의 복잡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이 지구도 마찬가지다. 태양의 수와 관계없이 지구 자신도 변수다. 어떤 변수들이 얼마나 있든 간에, 그것을 상대하는 자신도 계산과 영향 아래 놓인다는 것. 이 말은 한 세계의 운명에 있어 세계 자신 또한 상수가 아니라는 뜻이다. 삼체인에게는 지구에 도달했을 때 지구인들이 어떤 상태와 국면에 있을지가 고려할 요소 중 하나이며 400년 동안 지구 문명이 발전하게 될 정도를 가늠하는 것도 필요하다. 미래를 포기한 어느 지구인 과학자의 방탕한 일상 속에서 일어난 우연한 발견이 훗날 삼체인에 맞설 강력한 무기의 성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눈앞의 질문이나 앞으로 있게 될 위협의 정확한 실체도 밑그림도 못 본 채 일단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정된 위협이 어찌할 도리 없이 그저 맞이해야만 하는 심각한 것이라면, 그 앞에서 무얼 선택할 수 있을까. 선택의 결과를 모른 채 일단 대바카라이 있을 것임을 믿어야 하는 사람들도, 무엇을 해도 달라질 게 없다며 지레 포기해 버린 사람들도 그러니 저마다의 이유로 끄덕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 이래 과학자들은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걸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연구했다. 가설을 세우고 질문을 거듭하며 무언가를 증명하는 일. 수학과 물리 너머로 연구자의 집념이 발견을 이끌고 문명과 환경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렇지만 이해에의 노력이 항상 정확한 결과에 이르는 건 아니다. 운 나쁘게도 원하는 값이 도출되지 않을 수 있다. 값을 얻었어도 그게 실험실 밖에선 성립하지 않을 수 있고 특정한 결과를 관찰했어도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표본을 조금만 달리 선정해도 신뢰도에 영향이 생긴다. 실험이 실제에 다가가는 길은 어려운데, 그 길을 닦은 가설 자체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를 일. 이해 뒤편에는 그래서 몰이해가 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논리나 인과로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삼체문제의 일반해가 수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상기하자면 이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은 어떤 직업적 믿음이나 윤리, 혹은 생존의 근간과도 멀리 있지 않는다. 삼체인이 인류의 기초과학 발전을 갖가지 방식으로 방해하려 드는 건 다시 말해 인간이 세상을 더 이해하려는 시도를 가로막는 것이다. 어차피 너희는 벌레니까. 우릴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더 알아내려고 들지 마.


행성방위이슬롯 주도 하에 미래 계획을 세우는 이들은 전략을 어떤 사람에게도 설명해선 안 되는 '면벽자(Wallfacer)'들이다. 삼체인이 지자를 통해 인류의 모든 걸 감시하고 있으므로 노출되는 순간 계획은 성공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면벽자는 오직 생각으로만 구상해야 하고 설명 없이 누군가의 행동을 지시할 수 있다. 면벽자의 선택은 타인은 물론 자신도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한 채로 행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대개 인생과 비슷하다. 면벽자의 권한을 개인의 의지로 반납하거나 무를 수 없다는 점은 마치 살아 있는 한 삶이 계속되는 것과도 닮았다. 전략을 완성, 실현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 인류가 면벽자 아이디어를 착안한 건 삼체인이 인간의 머릿속까진 감시할 수 없어서다. 생각과 의도가 동시에 전달되는 소통방식을 가진 삼체인이 인간의 농담, 유머, 거짓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도 단서가 된다.


소설과 달리 넷플릭스 [삼체] 첫 시즌은 일단 군인과 과학자 등으로 구성된 수 인의 면벽자를 선발해 인류가 삼체 문명에 대한 반격 준비를 시작하는 대목까지 다룬다. 400년의 시간을 예비하면서 자신이 죽고 난 뒤까지 계산해야만 하는, 끝없는 변수를 하나하나 헤아려봐야만 하는 학자의 운명을 떠올리면 범상한 나는 삼체인이 되어볼 수도, 삼체인을 상대할 지구인이 되어볼 수도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과학에 대한 믿음의 근간이 통째로 흔들린 세계에서 어떤 가치를 지킬 수 있을지 대신 상상이나 해 볼 뿐이다. 사이언스픽션은 우주적 범주에서 나 한 사람의 문제가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를 상기시키는데, 나아가서 그 한 사람의 문제가 한 세상 전부에 상응하는 수준의 것일 수 있음을 느끼게 하는 곳은 픽션 바깥이다. 우주적 차원의 문제로 이렇듯 삶의 불확실성을 끌어올려 본 건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볼수록 한없이 아득히 다가오기 때문이다. 다 볼 수 없는 삶의 궤적을 그리려다 보면 머릿속은 자꾸만 우주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십 년 전. 첫 회사에 입사한 지 10개월여 만에 퇴사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지 않았고, 회사로부터의 어떤 연락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니 나는 자유의 몸이 됐다. 영화의 극장 개봉에 관여하는 홍보 및 마케팅, 배급 업계 전반에 있어서 생태계 거의 최하층이라 할 수 있는 온오프라인 홍보마케팅 대행사들 중에서도 그곳은 처우가 안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월 100만 원 초반대의 급여에도 나는 좋아하는 걸 업으로 삼을 수 있어 감사하다는 일념으로 어떤 모욕감도 야근과 착취도 견뎠다. 지금은 무단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얼마나 사용자에게 폐를 끼치는 일인지 모르지 않지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숨이 막히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싫어지는 나날을 벗어나니 짧은 행복이 찾아왔지만 통장에 급여가 들어오지 않으니 당장 먹고살 궁리도 해야 했다. 이상하게도 두렵진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몇 백만 원을 은행에서 빌렸다. 그 뒤 십 년은 기업의 재무제표상 자산은 부채와 자본으로 구성된다는 걸 개인의 단계에서 직접 체감한 기간이었다.


그 무렵 사건의 변수는 곧 나 자신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당장 계좌 잔고를 보며 나날의 지출 비중을 안배하고 긴축을 실행할 만큼 철저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회사에 안 다녀도 씀씀이가 그다지 줄지 않았고 불과 한 달 반 정도 후에 다음 온라인 게임에 입사했지만 당시의 나는 미래의 내 벌이를 현재 시점에 당겨와 헷지(Hedge)하는 길을 택했다. 다행히도 다음 온라인 게임은 급여가 나쁘지 않았으므로 어느 정도 헷징이 가능했다. 이듬해 말 두 번째 회사를 그만둔 건, 당시 나 정도의 경력이면 이직이 크게 어렵지 않을 거라는 지레짐작 때문이었다. 몇 군데 수입사, 배급사에 지원했지만 원하는 대로의 커리어 전환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홍보마케팅을 거쳐서 배급사로 많이 간다던데. 내 능력이 부족한가, 운이 안 좋은 건가. 면접에서는 매번 최종 문턱을 넘지 못했다. 무단 퇴사한 적이 있으니 평판의 문제였을까.


온라인 게임 커리어의 공백이 길어지면서 내 생활의 모든 건 생계가 중심이 됐다. 유료 구독자를 받아 이메일 연재도 했고 하루이틀짜리 단기 아르바이트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상품권 같은 게 생기면 현금화 했다. 이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을 담대함은 없었지만 당시 만나던 인연과도 자연스럽게 이별을 통보했다. 금전적인 위기를 겪는 동안 커리어 단절의 불안을 느끼면서도 내 생활습관과 기호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마트보다 편의점이 익숙했고 퇴근 후 혼술이나 사고 싶은 바카라 같은 건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제 능력의 100%를 초과하는 무엇을 선취해 연명하던 나날 속에서 조금씩은, 생존법을 터득하고 부채의 비중을 줄여오기는 했다. 그렇게 몇 년이 더 지났고 다행스럽게도 지금 오 년 넘게 재직 중인 회사에서는 성과와 기여도를 인정받으면서 연봉 테이블을 입사 시점보다 제법 더 올렸다. 가고 싶은 콘서트를 망설임 없이 예매하고 도쿄행 항공권을 예약하며 좋아하는 이모티콘을 사고 모바일 게임의 과금을 한다. 가끔씩 피곤을 이유로 택시를 잡는 사치를 부려도 당장 내일의 생계에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이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라는 감각이 지난날의 내게는 문제였다. 나 말고 세상 사람들은 자산을 축적하는 데 부지런해 보였고 충분히 계산적인 듯했으니까. 내가 붙잡고 있는 문화예술과 취향의 영역은, 먹고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끝내 버리지는 못했다. 영화 한 편과 바카라 한 권이 언젠가는 무언가를 알려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평생을 함께하자며 손 내밀었던 이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발단은 스스로 나이에 걸맞지 못한 능력과 여건에서 살고 있다는 자각이었다. '능력이 더 있었다면' 같은 가정을 이후로 몇 번 해봤다. 떠나와야 했거나 멀어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들의 손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리하여 그들과 좀 더 길게 연을 이어올 환경이 되었다면 삶은 조금 다른 모습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굳이 남들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자족적인 일상을 지켜오고 있는 것 같다 여기는 동안에도 문득 자신을 작아지게 만드는 순간은 찾아왔다. 십 수 년을 함께 해 온 인연들과 송년회며 청첩장 모임이며 갖가지 이유로 대면할 때면, 그들만이 집 값과 육아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는 점점 낄 자리가 없어졌다고 느꼈다. 슬롯의 일인분을 다 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 같다는 감각. 자족적 일상이 실은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가지 못한 채 여러 핑계나 합리화 속에서 만들어진 좁은 울타리는 아닐까 하는 기분. 그러자 마음만으로 관계의 바카라임을 다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며 억지로 인연을 잇기보다 혼자가 되기를 택했다. 나보다 나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봐주는 사람에게, 줄 수 없는 걸 약속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더 용기 내지 못한 가을이었을지도.


관건은 인생의 변수를 어디까지 상정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만약 내가 그 첫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이 가정을 뒤집으려면 전공하고 싶었던 경영학부에 다니면서도 좋은 평균 학점을 얻지 못하고 두 번의 초과학기 끝에 간신히 졸업했던 학부 때의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초봉 테이블이 높은 더 큰 기업에 들어갈 만한, 소위 말하는 스펙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부는 곧잘 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던전앤파이터에 미쳐 있었던 나 자신에게도 소감 한 마디 구해야겠지) 밑바닥이라 할지라도 어디서든 시작해서 올라가면 될 거야. 앞으로도 영화를 좋아할 거니까 어떤 것도 내 커리어가 될 거야. 그렇게 믿기엔 첫 회사의 경험은 일상을 망가뜨렸고 그것까지 견딜 만큼 강하지 못했다. 여기엔 그다음 변수가 끼어든다. 만약 첫 회사에서 박봉에도 불구하고 모욕적인 경험 없이 끈끈한 회사 생활을 이어나갔더라면? 오히려 거기 더 오래 다녔다면 근무 환경과 월급 자체가 달랐던 두 번째 회사에서만큼의 벌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뿐만 아니라 살면서 만나는 걸러내지도 통제하지도 못할 무수한 타인들, 짧게라도 거쳐가는 모든 환경이 저마다 삶의 변수로 밀려온다. 지금은 언제나 지금 직전까지가 만든 결과다. 그리고 그 결과를 말해주는 건 오직 시간뿐이었다. 뭐든 계산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면 역설적으로 아무런 결정도 행동도 하지 못했으리라. 타고난 기질과 성정 내지 당시의 상황은 그 변수들을 우회하도록 허락해주지 않았을 것이고, 내 삶의 변수였던 누군가의 선택을 그때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없는 터널과 갈림길을 생각하려면 그간 나라는 변수를 감당하고 끌어안아 주었던 이들에게 미안하고도 고마워진다.


혼자의 일상을 누리면서도 나이와 조건을 둘러싼 (가족을 포함한) 주변의 말들을 완전히 무시하기란 어렵다. 누가 묻지 않아도 질문은 스스로를 향한다. 내가 더 일상적으로 근면하고 거시경제적으로 기민한 사람이었다면, 그리하여 삶의 어떤 선택의 기준에 있어 잔고가 아니라 오직 직감과 끌림만으로 추구하려는 가치를 지켜낼 수 있었다면. 잘 살고 있는가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만큼의 무엇을 지금 일궈냈다면. 언제나 통용될 단일한 정답이란 있을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앞에 두고, 내가 끝내 포기하지 않은 것들이 덧없고 어리석진 않을까, 여태껏 엉뚱한 방향으로 살아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던 시절을 이제는 간신히 딛고 넘어온 것 같다. 완전히 다 통과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은 인생이 어차피 계획할 수도 없고 뜻한 바대로 안 되며 장기적인 설계보다는 오늘의 성실과 최선을 다하고 내일도 그러하겠다는 작정 정도를 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자조하는, 살아온 나날을 이제야 보듬는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드는 중이다. 미지의 내일 앞에서 살아갈 날들의 성실함과 항상성을 오늘만큼은 어떻게든 믿으려 노력하면서.



생을 인과로 서술할 도리는 없다. 설명하려면 할수록 더 많은 변수와 조건이 뒤늦게 고개를 내밀고 그림자를 드리운다. 만약에. 딱 그것 하나만. 셀 수 없을 가정을 거듭하다 보면 지금 쓸 수 있고 써야 할 문장을 적지 못하게 되고 더는 고칠 수 없게 된 문장에 자꾸만 손을 댄다. 이미 써낸 서사는 재해석과 리뷰는 가능할지언정 대사와 장면 자체에는 개입할 수 없다. 그러니 거쳐온 선택과 판단의 일부라도 지워내려면 인생 자체가 성립하지 않게 될 것이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을 운과 우연은 애당초 변수인 동시에 계산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무의미한 거대한 순리의 영역 같다. 다시 돌아가서 어떤 선택 하나를 바꾸려고 한들 그것마저도 내 최선이었다면? 때마다 내린 결심과 지나온 것들에 손을 흔들어주는 일은 인생이 가정법이 아니라 완료형의 평서문들로만 쓰여간다는 걸, 동시에 어느 한 가지 분명한 이유만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걸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걸 배우는 방법은 일단 살아보는 것밖에는 없었다.


지나온 선택의 바카라임을 지고 실수를 끌어안는 게 어른의 삶이라는 걸, 미련 없이 완벽한 삶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삶일지도 모른다는 걸 이제는 가까스로 안다. 거기 있는 상처도 후회도 짊어져야만 한다는 것도. 다른 대안은 없고, 요행히 다시 그때 어느 한 시점으로 회귀할 수 있다 해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나인 한 전혀 다른 판단을 했을 리 없다는 것도 안다. 그게 가능하려면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나는 타고난 모양이나 살아온 양태를 방향타 삼아 각각의 시절을 어떻게든 감내하며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만일 두 번째 버전의 지구가 저편에 있어 거기서도 내가 살고 있다면 둘은 마치 유전자가 거의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 같은 존재여서 삶의 세부는 일면 다를지라도 전체적인 궤적은 다르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지구에서도 항성이 셋인 행성에서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마치 삼체인에 맞설 전략을 고독하게 머릿속에서만 세우는 면벽자들처럼, 생을 납득할 수 있고 지난 선택의 작용을 삼키고 소화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삼체]에서 가늠할 수 없는 400년 뒤를 위해 싸우는 이들은 무얼 위해서 거기 임하냐는 질문에 "맞서 싸운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라고 답한다. 무엇과 맞서 싸워야 할까. 슬롯의 잣대, 나를 시험하는 타인들, 때마다 야비하게 찾아오는 운명의 장난? 결국 그 모든 걸 마주하는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어떤 신념이나 취향, 옳거나 추구해야 한다 믿는 무엇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분명 어느 틈엔가 나약해지고 불안해하며 넘어질 것이다. 몇 번의 잘못과 후회를 거쳐야 할지는 셀 수도 없을 것이다. 무한한 변수들 사이에서 결정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불확실한 오늘을 통과해야만, 확실한 건 오직 확실하지 않음 뿐이라는 걸 조금이라도 더 받아들여야만 내일로 건너갈 수 있다. 앞으로 몇 번의 시절을 더 지나쳐온다 해도, 다 이해했다고 말할 날은 끝내 오지 않을지 모른다.


평생 후회 같은 건 해본 적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나 겁쟁이 둘 중 하나일 거라고 말해준 이의 이야길 생각하며 밤길을 거닐다 집에 온 새벽, 모로 누워 있다 가만히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 그렇게까지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그렇게 말해준 이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이 생은 발을 헛딛으면서도 제법 견뎌볼 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주는커녕, 지구 대류권 밖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이 생은 이 자리에서 그 명운을 다할 수도 있다. 400년은 고사하고 인류 멸망의 시계가 자정까지 한 세기도 채 남겨두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한 넘어진 자릴 털고 상처를 수선하며 살아야 한다. 다음 날 눈 떴을 때 갑자기 세 개의 태양이 합심해 이 지구를 불태워버린다 해도, 내세울 것도 없이 평범한 삶이었다 해도 추구하는 가치를 끝내 지켜내려고 일어섰던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맞서 싸워야죠, 라며 당연하다는 듯 말하던 [삼체] 속 과학자의 말을 가만히 되뇌는 오늘이다. 지금 살아 있는 나의 총합은 저 변수들을 지나온 어이없을 만큼 기막힌 우연의 산물일지도 모르지만, 순간순간의 조각들은 매번 필연적으로 쓰여 왔을 것이다. 다가오는 것들 역시 의연하고 묵묵하게 맞이하며 무릎이 깨지더라도 생의 남은 길을 한 걸음씩 더 걸어가보겠다. 살아갈 인생에 일반해라는 게 있어 그 답지를 맞춰볼 때가 온다면, 그때 나는 이미 여기 없을 것이지만 누군가 한 사람은 내 오답을 더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



-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 게 어떤가.

詩에는 아무것도 없다. 詩에는

남아 있는 우리의 生밖에.

남아 있는 우리의 生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오규원, 「용산에서」 부분


넷플릭스 시리즈 '삼체' 포스터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tt.ly/cosmos__j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편협해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