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
연말과 세기말은 얼마나 다를까. 새해를 앞둔 마지막 금요일. 야근을 하고 바로 이동해 예정된 영화 모임을 진행했다. 지난달에 이어 이번 달에도, 영화 모임 진행자가 영화 시작 전에 도착하지 못하고 영화가 끝날 무렵에야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모임에서 다룬 영화는 리들리 스콧 감독 작품 <블레이드 러너>(1982)였다. SF 문학 거장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작으로 한 <블레이드 러너>는 황폐화된 '2019년 11월'의 지구, LA를 배경으로 인조인간 '레플리컨트'(소설의 '안드로이드')를 소재 삼아 깊고 넓은 물음을 던지는 영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이 이보다 알맞기 어려운 영화. 개봉 당시에는 혹평을 받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재평가' 받아온 <블레이드 러너> 역시 최근의 내가 천착해 있는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장르에 관해 화두를 이어가게 만든다. 지금 여기 없고 앞으로도 있기 어려운 것, 혹은 언젠가는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 생각하기는 막연한 것들을 '상상'해서 만들고 보여주는 SF의 힘은 무엇일까. 인간이 상상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던지는 <블레이드 러너>의 어두운 밤 빗속의 LA를 배경으로,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2019년 11월을 지난 실제 2019년 12월의 접어들어 생각한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레플리컨트 중 일부는 경찰 조직이라 할 수 있는 '블레이드 러너'들에게 쫓기는 처지가 된다. 주인공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도 레플리컨트를 추적하는 인물 중 하나인데, 영화에는 상대가 인간인지 아닌지를 가름하기 위한 테스트가 등장한다. 특정한 상황이나 이야기를 제시해주고 거기에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인간과 달리 레플리컨트, 곧 인조 인간의 감정은 프로그램으로 학습된 표현이므로, 어떤 자극과 그에 따른 반응 사이에 무엇인가 '인간적이지 않은' 것이 있다. 예컨대 누군가 들려준 이야기가 슬프게 다가올 때 사람은 그것의 근원적 감정에 공감하고 자연스러운 슬픔을 표현하지만 로봇이라면 '그 상황은 인간이 슬픔을 느끼는 상황이므로 거기에 맞는 표현을 출력'하는 쪽일 테니까. 그런데 레플리컨트 중 하나가 주인공 '데커드'에게 툭 질문한다.
"당신도 그 테스트 받아본 적 있어요?"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의 가치는 일차적으로 '질문'이고 그 다음은 '의심'이다. 주인공을 비롯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 특별히 의문을 제기하거나 의심해본/의심해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사람임을 증명해보라'고 하면 당황스럽겠다. 내가 사람이 아니라면 그건 또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질문 자체의 난해함 때문이라기보다 평소에 당연하게 여겨왔을 것이고 그게 또 온당한, '나는 인간이다'라는 명제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삶에서 밤잠 못 이뤄가며 '나는 왜 인간일까' 같은 주제에 대해 연구할 일이나 필요는 누구에게나 있지는 않겠지만, 픽션은 그것을 대신 해준다. 이야기는 그렇게 의심의 영역에서 가능의 영역으로 관객(독자)를 이끌어준다. 어떤 이야기를 만났을 때 그것을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는 이유가 비로 이것이다.
"전 여전히 훌륭한 이야기의 가치와 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 대부분은 무뚝뚝함과 불친절함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접했던 훌륭한 서사 예술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돌이켜보세요. 그리고 그 경험이 어땠는지도. 감상이 끝난 뒤 여러분의 일부가 된 작품들도 여러분이 원하는 것만 주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은 늘 원치 않은 상황과 마주치고 그 이야기가 전달하는 메시지 역시 여러분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 어쩔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세상과 이야기꾼과 여러분과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그 안에서 이야기와 메시지의 힘이 생기는 거죠. 캐릭터도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캐릭터들은 조종할 수 있는 게임 캐릭터와 거리가 멉니다. 그들은 변화할 수 없는 과거에 지배당하고 툭하면 끔찍한 선택을 하며 그들의 욕망은 온전히 충족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피엔딩에 도달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죠. 훌륭한 장르물 창작자들은 이를 잊지 않습니다. 이들은 판타지만을 창조해내지 않아요. 세상을 뒤트는 힘을 이용해 더 큰 불안과 불만족과 질문을 창조해내는 사람들입니다."
(듀나,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에서)
필립 K. 딕이 쓴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소설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간에게는 매우 이상하면서도 감동적인 뭔가가 있어요.” 이상한데 감동적인 것, 감동적인데 이상한 것. 얼핏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 표현도 사람에 관해서라면 가능하다. 모순적이어서 사람이다. 인간이 불완전함과 세상의 불확실함이 결국 이야기를 만들지 않을까. 여기 없는 것을 상상하는 힘이 어떤 발견이나 발명을 이룬 것은 아닐까. 그것이 또 이야기가 되기도 하지 않았을까. 있을 법한 이야기를 상상하는 일에도 그래서 힘이 있지만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상상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로 힘을 지닌다(고 믿는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만드는 건 메리 올리버가 말한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같은 것에도 있겠지만 주어진 것에 대해 의심하고 익숙한 것에 대해 질문하는 능력도 포함되겠다. 상상하는 사람과 질문하는 사람은 곧 같은 사람이다. 머무르지 않고 어딘가로 나아가려 하는 사람. 길이 어느 쪽으로 펼쳐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을 끝내 극복하거나 수용한 채로 언젠가 새 길의 복판에 서 있을 사람. 세기말스러운 영화 한 편을 다시 꺼내며 연말을 돌아보고는 특히 지난 한 달을 주의 깊게 생각했다. 내가 쓰는 글이 때로는 질문하기보다 대답하기에 급급했던 적은 없었을지, 읽은 이에게 그 시간만큼의 보람이나 가치를 선사하지 못한 적은 없었을지.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조율해보았던 모든 순간들이, 읽어준 당신에게는 언어에 그치지 않는 이야기가 되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년의 ‘나’는 더 좋은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기를. (2019.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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