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은 시간을 너에게 줄 수 있다면
"삐- 삐- 삐-"
규칙적인 기계음만이 차가운 병실의 공기를 무겁게 가르고 있었다. 그 건조하고 일정한 소리는 마치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초 단위로 깎여나가는 카운트다운 같았다. 도윤은 멍한 눈으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해수를 바라보았다. 한때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게 생기가 돌던 뺨은 이제 창백한 종잇장처럼 핏기가 가셔 있었고, 윤기 나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독한 항암 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바스러져 갔다.
도윤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해수의 마른 손을 쥐었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그녀의 손이 도윤의 큰 손안에 온기 없이 힘겹게 안겼다.
"도윤아..."
잠결에 뒤척이던 해수가 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도윤은 금세라도 떨어질 눈물을 소매로 황급히 훔쳐냈다. 슬픔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그녀의 얼굴 위로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응, 해수야. 나 여기 있어. 물 줄까? 어디 불편한 곳 있어? 간호사 부를까?"
"아니... 그냥. 우리 잘생긴 남편 얼굴 좀 보려고 불렀지."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해수는 도윤을 향해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아픈 와중에도 농담을 던지는 그 특유의 씩씩한 미소를 보는 순간, 도윤의 가슴 한구석이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듯 심하게 아려왔다.
불과 한 달 전이었다. 결혼 10주년을 기념해 둘은 하와이 여행을 계획했고, 해수가 회사 로비에서 갑작스럽게 쓰러진 것은 여행 출발 딱 일주일을 앞둔 시점이었다. 평소 소화가 잘 안 된다며 바카라상 서랍에 소화제를 종류별로 쌓아두고 살았던 그녀를, 그저 잦은 야근으로 인한 만성 스트레스성 위염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매년 건강검진을 꼬박꼬박 받는다는 사실에 안일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멍청함이 뼈에 사무치게 원망스러웠다.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 그리고 종양내과로 이어지는 숨 가쁜 일정 속에서 도윤이 마주한 진실은 잔인하다 못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췌장암 말기입니다. 전이가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수술은 불가능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길어야 3개월입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의 입에서 건조하게 툭 튀어나온 ‘3개월’이라는 단어는 도윤의 세상을 산산조각 냈다. 서로의 눈빛만 봐도, 아니 숨소리만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10년의 결혼 생활이었다. 그전부터 이어져 온 10년이 넘는 친구로서의 시간을 합치면 도윤의 인생 절반 이상이 '윤해수'라는 세 글자로 빈틈없이 꽉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찬란했던 모든 시간이 고작 3개월이라는 시한부 선고 앞에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진통제 기운에 취해 해수가 다시 얕은 잠에 빠져든 것을 확인한 도윤은 병상 옆에 놓인 백팩에서 낡은 가죽 수첩 하나를 꺼냈다. 모서리가 닳고, 가죽 코팅이 벗겨져 색이 바랜 도윤의 오랜 일기장이었다.
도윤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 교복에서 덜 마른 비누 냄새가 나던 열여덟 살 무렵부터였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순정 만화에나 나오는 과장된 헛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2학년 1학기 봄, 전학생이었던 해수가 칠판 앞에 서서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던 그 찰나의 순간 도윤의 세상은 거짓말처럼 멈춰버렸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 교실에 피어오른 분필 가루 먼지마저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특수 조명 같았다. 단정하게 묶은 포니테일과 맑은 눈동자. 도윤은 잠깐이지만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소녀 앞에 선 열여덟의 소년은 뭘 해도 서툴고 바보 같았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쿵쾅거리는데, 막상 그녀 앞에서는 얼굴이 토마토처럼 달아오르고 아래 윗입술에 풀이라도 발라놓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그 부끄러움과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도윤이 택한 방법은 참으로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매점에서 사 온 차가운 캔 음료를 그녀의 볼에 불쑥 갖다 대어 깜짝 놀라게 만들거나, 정성껏 필기해 둔 노트를 휙 빼앗아 들고는 글씨가 이게 뭐냐며 핀잔을 주는 식이었다. 어쩌다 해수와 단둘이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심장 소리가 들킬까 봐 오히려 더 마음에 없는 삐딱한 말이 튀어나왔다.
'야, 윤해수. 너 방금 수업 시간에 졸았지? 앞머리 붕 뜬 것 좀 봐라. 거울 좀 보고 다녀, 칠칠치 못하게.'
'치마 돌아간 것 좀 봐라. 복도에서 혼자 달리기라도 했냐? 덜렁대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툭툭 내뱉는 퉁명스러운 말들에 해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그를 얄밉게 흘겨보았다.
'이게 진짜-, 넌 입이 문제야!' 해수는 씩씩거리면서도 기가 찬다는 듯 쥔 주먹으로 도윤의 등짝을 매섭게 후려쳤다. 도윤은 아프다고 과장된 엄살을 부리며 교실 복도를 도망치면서도, 씩씩거리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해수의 화난 모습조차 마냥 예쁘고 좋아서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도무지 막을 길이 없었다. 물론 그 유치한 짓을 저지르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침대에 누워 이불을 뻥뻥 걷어차며 처절하게 후회하곤 했다.
'이 미친놈아, 서도윤 바보 멍청이. 또 그따위로 굴었네. 오늘 머리 묶은 거 진짜 예뻤는데. 교복 치마 단정한 것도 완전 내 이상형인데. 그냥 예쁘다고, 친하게 지내자고 다정하게 말해주면 혀에 가시가 돋냐?'
속이 상해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면 도윤은 바카라상 스탠드를 조용히 켜고 비밀스러운 일기장을 펼쳤다. 그날 그녀가 지었던 뚱한 표정, 화를 낼 때 살짝 올라가던 눈꼬리, 체육 시간에 입었던 조금은 커 보이는 헐렁한 체육복을 입은 귀여운 그녀의 모습, 쉬는 시간에 바나나 우유를 마시던 그녀의 하얗고 가는 목, 그리고 차마 현실에서는 전하지 못했던 자신의 끓어오르는 진짜 마음을 빼곡히, 아주 구구절절하게 일기장 가득 적어 내려갔다.
역설적이게도 그 쉴 새 없는 유치한 장난 짓(?) 거리들 덕분에 도윤은 해수와 가장 편하고, 가까운 남사친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해수에게 서도윤은 굳이 예쁜 척을 하거나 내숭을 떨 필요가 전혀 없는 볼장 다 본 둘도 없는 불알친구였다. 다른 학교 남자애들에게 고백을 받거나 연애편지를 받았을 때도 해수는 도윤에게 가장 먼저 달려와 호들갑을 떨며 진지하게 연애 상담을 했다. 그럴 때마다 도윤의 속은 질투심에 새카맣게 타들어 갔지만, 겉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냉철한 친구인 척 그녀를 마주했다. 물론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상담을 가장한 '철통 방어 공작'이었다.
'야, 옆 학교 그놈? 걔 축구 같이 해본 내 친구들이 발냄새 장난 아니라고 하던데? 성격도 엄청 쪼잔하데. 패스 한 번 안 했다고 삐친다고 하더라고. 내가 봐서는 너랑 상극이야. 그것도 아주 극상극.'
'뭐? 그 복학생 선배가 주말에 드라이브 가자고 했어? 야, 조심해라. 그런 부류는 여자친구보다 자기 차 휠 긁히는 걸 더 슬퍼할 인간이야. 그리고 너 차 오래 타면 멀미하잖아. 안 맞아, 절대 안 맞아.'
해수가 만날 뻔했던 수많은 '썸남'들은 도윤의 이 말도 안 되는 유치한 핑계와 억지 논리 덕분에 시작도 전에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방해 공작이 성공할 때마다 도윤은 겉으로 티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방으로 돌아와 홀로 남겨진 밤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씁쓸함이 위쓸개액의 속 쓰림처럼 밀려왔다.
'언제까지 치사하게 남의 험담이나 지어내며 그녀의 옆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언젠가는 이 어설픈 방어막을 뚫고, 내 핑계가 전혀 통하지 않는 진짜 멋진 놈이 나타나 고백해 버리면 어쩌지?'
오롯이 방구석 일기장만이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그 찌질하고도 애틋한 자신의 두려움과 자바카라을 받아내고 있었다.
‘오늘도 해수의 소개팅을 파투 냈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연애를 안 해서 다행이면서도, 정작 내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할 용기는 없는 내가 너무 등신 같다. 그래도 오늘 내 앞에서 웃는 해수는 유난히 예뻤다.’
그렇게 가슴속으로만 꾹꾹 삼켜야 했던 짝사랑의 기록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해 활자로만 토해내야 했던 도윤의 절절한 진심은 고등학교 교실에서부터 대학 캠퍼스를 거쳐 온라인 게임인이 될 때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긴 시간의 궤적을 따라, 낡은 일기장 속에는 오랜 시간 그녀를 향한 애틋한 감정들이 겹겹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새 열여덟의 소년 소녀는 교복을 벗었고, 치열하게 대학 생활을 마치고 졸업을 했으며, 어느덧 슬롯의 쓴맛을 아는 어엿한 온라인 게임인이 된 어느 가을날이었다. 도윤은 더 이상 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감정을 얄팍한 '우정'이라는 이름표 뒤에 비겁하게 숨길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평생 그녀의 곁에 친구라는 핑계로 머물다가 훗날 그녀의 결혼식장에서 멋쩍게 축의금이나 내고 다른 남자의 손을 잡는 그녀를 향해 바보처럼 박수를 쳐줄 자신은 도저히 없었다.
결전을 앞두고 도윤은 전신 거울 앞에서 몇 날 며칠을 밤새워 수백 번이나 고백 멘트를 연습했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두 사람이 열여덟 살에 처음 만났던 그 고등학교 교정, 빛바랜 낡은 벤치로 그녀를 불러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미리 준비한 장미꽃다발을 등 뒤에 숨긴 도윤이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해, 해수야. 나... 너 좋아해! 아주 오래전, 우리 처음 교복 입고 만났을 때부터 널 내 마음에 담아왔어. 단 한 번도 네가 친구인 적 없었어. 이제 네 친구 말고, 남사친 말고, 네 남... 콜록콜록... 흠흠... 네 남자 할래! 나랑 정식으로 사귀어보지 않을래?"
너무 긴장한 나머지 비장하게 내뱉은 목소리가 사레들린 기침에 그만 심하게 삑사리가 나는 바람에 분위기는 로맨틱하기는커녕 엉망진창 코미디가 되어버렸다. 벤치에 앉아 텀블러에 담아 온 커피를 마시던 해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윤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서도윤- 괜찮은 거지? 아님 미쳤나? 혹시 어디다 보증 잘못 섰어? 나한테 급전 빌려달라고 밑밥 까는 거지, 지금?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고 징그럽게 왜 이래, 사람 소름 돋게!"
해수의 가차 없는 타박에 도윤은 당황하여 울상이 되었고, 결국 등 뒤에 엉성하게 숨겼던 빨간 장미꽃다발을 그녀의 무릎 위로 쑥 내밀었다.
"진심이야... 나 진짜 너 좋아한다고, 바보야."
장난기가 싹 사라진 목소리, 도윤의 새빨개진 귀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동공을 그제야 제대로 확인한 해수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꽃다발과 도윤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금세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바보야... 그걸 왜, 왜 이제 말해. 사람 맘고생은 다 시켜놓고선..."
해수는 어린아이처럼 훌쩍이며 먼저 다가가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고, 도윤은 세상을 다 가진 듯 뜨거운 숨을 내쉬며 그녀를 부서져라 마주 안았다. 돌고 돌아 마침내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두 사람은 그로부터 딱 1년 뒤 가족이 되었다.
'징글징글 징한 것들, 10년을 친구인 척 사기 치더니 결국 결혼을 하긴 하네.'
수많은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축복과 환호는 덤이었고, 둘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부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