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안 되는 사랑:독자 사연

담임이었던 그를, 아직 잊지 못합니다

by유혜성


하면 안 되는 사랑:독자 사연


〈담임이었던 그를, 아직 잊지 못합니다〉


작가님께.


이 편지를

어떤 이름으로 시작해야 할지 오래 망설였습니다.


잘못이라고 써야 하는지,

사랑이라고 써야 하는지,

아니면

한때 지나간 계절이라고 써야 하는지

끝내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 아이의 담임이었습니다.


처음은

학교 상담실이었습니다.


아이의 성적,

친구 관계,

학교생활,

진로에 대한 이야기.


아주 평범하고

예정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상담은

생각보다 조금 길어졌습니다.


아이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제가 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 결혼,

제 선택,

지금의 삶.


그는

쉽게 조언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용히 듣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결정하신 이유가 있었겠죠.”

“지금은… 괜찮으세요?”


그 질문이

이상할 만큼 오래 남았습니다.


누군가가

제 삶을 그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본 게

참 오랜만이었기 때문입니다.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제가 먼저 말했습니다.


“선생님,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 한 잔 하시면서 이야기 조금 더 나눠도 될까요?”


그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 우리는

학교 근처 작은 카페에 앉았습니다.


처음에는

여전히 아이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조금씩 바카라 이야기로 흘러갔고,

생각 이야기로 흘러갔고,

결국엔

사는 이야기로 흘러갔습니다.


그와 저는

좋아하는 바카라이 비슷했습니다.


제가 밑줄 그어 읽었던 문장을

그도 기억하고 있었고,

그가 좋다고 말한 작가를

저도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이 사람과는

말이 통하는 결이

조금 다르다는 걸.


이후로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 학교 행사에서

바카라을 읽고 이야기하는 자리가 생겼습니다.


처음엔

정말 바카라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인문학적인 대화,

문장에 대한 이야기,

삶에 대한 해석.


마치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 선후배를 다시 만난 것처럼

어색함 없이 말이 이어졌습니다.


그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담임과 학부모라는 관계가

마음에 걸리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조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른이니까.

각자의 가정이 있으니까.

이 정도의 정신적인 교감쯤은

알아서 다룰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다

학교 밖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습니다.


복도가 아니라

서점이었습니다.


저는 바카라장 사이에 서 있었고,

그는 제 맞은편 코너에서

바카라을 꺼내 들고 있었습니다.


서로 너무 놀라서

한동안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바카라이

며칠 전 제가 읽고 있던 바카라과

같은 바카라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서점 안 카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날은

아이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바카라 이야기,

문장 이야기,

살아온 시간 이야기.


마치

원래부터 알던 사람들처럼

말이 이어졌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더 자주 만났습니다.


이젠 바카라을 핑계로

한 달에 한 번쯤

독서 모임처럼,

토론처럼,

그러나 사실은

서로를 보기 위해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순수하다고 믿었습니다.


바카라을 읽고,

이야기하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관계.


하지만 사람 마음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깊어졌습니다.


고백은 없었습니다.


대신

더 길어진 침묵과,

더 오래 머무는 시선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남는

이상한 떨림이 있었습니다.


누가 먼저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 더 잘못했다고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서로의 마음이

천천히 같은 방향으로 기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건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삶을 새로 짓기 위한 사랑이라기보다

늦게 만난 두 사람이

너무 늦게 서로를 알아본 사랑에 가까웠습니다.


둘 다

가정을 버릴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둘 다

지금의 삶을 당장 깨뜨릴 용기로 움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조심했고,

더 아팠고,

더 늦었습니다.


그러다 먼저

제 쪽에 일이 생겼습니다.


제가 먼저 들킨 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어떤 확실한 증거를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남편의 의심이 시작됐습니다.


제가 혼잣말처럼 흘리던 감정들,

무심코 남겨둔 문장들,

설명할 수 없는 작은 변화들.


그걸 붙잡고

남편은 “누군가 있는 것 같다”는 감각을 먼저 알아차린 겁니다.


정확한 이름도,

정체도 모른 채

그저 의심만으로


제 일상은 서서히 조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부터

사이 좋은 부부는 아니었습니다.


늘 어딘가 불편했고,

늘 조심해야 했고,

이해받는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남편의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태도는

저를 오래전부터 숨 막히게 했습니다.


남편은

몇 차례 외도를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자는 그래도 집으로 돌아온다.”

“여자는 그러면 가정을 버리는 거다.”


TV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마치 저를 향하듯

그런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저는 점점

작아지고, 조용해지고, 말이 없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참았습니다.

두 번째에도 참았습니다.


그때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고,

무너뜨릴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는 사이에


남편을 향한 마음은

이미 많이 식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남편의 시선은

확인에서 감시로 바뀌었습니다.


외출도,

연락도,

일상도


이제는

설명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담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의 삶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저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남편은

그 사람의 직업도,

평판도,

앞날도

파괴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멈춰 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그 역시 아내에게 들킨 것으로 들었습니다.


우연히 핸드폰을 보게 된 아내가

이상한 기류를 먼저 감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평소에도 관계를 많이 통제하고,

주도권을 강하게 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집 안에서는 이미

그런 긴장된 분위기가 이어져 왔던 것 같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일 자체보다

“상대가 누구인지”에 더 집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 알게 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말을

분명하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멈췄습니다.


말이 줄었고,

연락이 끊겼고,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서로에게서

물러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전화도 할 수 없고,

문자도 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학교에 아이 상담 때문에 가는 날이면

심장이 먼저 뜁니다.


정작 우연히 만나면

아무 말도 못 합니다.


그는 침묵하고,

저도 침묵합니다.


눈빛만 잠깐 스치고

다시 아무 일도 없는 얼굴로 돌아갑니다.


그게 더 슬픕니다.


아이의 학교생활보다

그 사람의 안부가 더 궁금한 제가

너무 낯설고,

너무 무섭습니다.


저는

그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도 저를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서로를 지키기 위해

서로에게서 멀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게 끝일까요.


아니면

잠시 멈춘 걸까요.


세상에는

각자 결단하고 새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한때의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으로만 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감정도 함께 흐려진다고 믿는 사람도 있겠지요.


저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를 포기하는 건

그 사람만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그와 함께 살아났던

제 마음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붙잡고 싶다고 해서

붙잡을 수 있는 관계도 아닙니다.


작가님,


멈춘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정말 잦아들까요.


아니면

한 번 자기 자리를 만든 마음은

끝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걸까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익명

작가의 답장


<멈춘 사랑은 끝난 사랑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채로 봉인된 사랑일 때가 있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으며

처음 떠오른 건

이 사랑이 뜨거워서 아픈 것이 아니라

너무 늦어서 아픈 사랑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몸이 먼저 움직인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아이 상담으로 시작했고,

한 사람의 삶을 조심스럽게 묻는 말로 이어졌고,

바카라과 문장과 생각을 함께 나누다가

결국 서로의 마음까지 알아버린 관계.


그래서 더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건

순간의 일탈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정신적인 시간이 쌓여 있습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가끔 육체적인 끌림보다

오히려 정신적인 교감일 때가 있습니다.


말이 통하고,

문장이 통하고,

삶의 결이 통하는 사람.


그걸 만나고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당신이 지금 포기하지 못하는 건

그 사람만이 아닐 겁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살아났던 당신,

말이 통한다는 기쁨을 처음 다시 느끼던 당신,

누군가 앞에서

오래 닫혀 있던 마음이 열리던 당신.


그래서 이 사랑은

사람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 안에서 다시 살아난 어떤 세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실도 분명합니다.


그는 담임교사였고,

당신은 학부모였습니다.


둘 다 가정이 있고,

둘 다 배우자에게 들켰고,

지금은 더 다가가면

서로의 삶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멈춤은

마음이 식어서가 아니라

더 다가가면 서로가 파괴될 것을 알기 때문에

택한 침묵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질문은

“그도 나를 사랑했을까”가 아니라

“이 사랑을 나는 어떤 형태로 품고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계속 살아 있는 감정으로 품을 것인지,

가장 아름다웠던 한때로 봉인할 것인지,

아니면 결단으로 바꾸기 위해

대가까지 감수할 것인지.


그 셋은 전혀 다른 길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지금 당장

결단을 내릴 사람 같지는 않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도

그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그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직업도,

그 사람의 삶도,

그 사람의 평판도

당신 안에서는 아직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관계는

끝났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시작하겠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가장 아픈 중간에 서 있는 셈입니다.


멈춘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 정말 사라지느냐고 물으셨지요.


제 생각엔

사라진다기 보다

형태를 바꿉니다.


어떤 사랑은

함께 살지 못해도 오래 남고,

어떤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오래갑니다.


그래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억지로 잊으려 애쓰는 것보다

이 감정을 어떤 이름으로, 어떤 자리에서 살게 할지를 정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계속 현재형으로 붙들면

당신은 매일 무너질 것입니다.


하지만 한때 내 삶을 가장 깊게 흔들었던 사람,

가장 늦게 만난 나의 독서 모임,

가장 조용히 시작되어 가장 조용히 멈춘 사랑으로 두면

그 마음은 조금 다른 얼굴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침묵은

끝이라기보다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선택한 마지막 애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슬프고,

그래서 더 깊습니다.


하지만 결국

어떤 이름을 붙일지는

당신이 정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둘 것인지,

끝내 살아 있던 가장 아름다운 마음으로 둘 것인지.


그 질문 앞에서

당신은 결국

당신 자신의 삶까지 함께 봐야 할 겁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담임교사와 학부모.


처음엔 상담이었고,

그다음엔 바카라 이야기였고,

그다음엔 서로의 삶을 알아버렸습니다.


둘 다 가정이 있었고,

둘 다 조심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조용히, 깊게 움직였습니다.


지금은

둘 다 배우자에게 들켰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연락도, 만남도 멈춘 상태입니다.


여러분은 이 관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1. 처음부터 멈췄어야 할 관계였다

2. 잘못이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랑이다

3. 서로를 지키기 위해 멈췄다면 여기서 끝내는 게 맞다

4. 진심이라면 각자 결단하고 새 삶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묻겠습니다.


결혼한 사람에게

정말 더 위험한 건 무엇일까요.


잠깐의 육체적 끌림일까요,

아니면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정신적인 교감일까요.


마지막으로,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멈추는 선택.


여러분은 그걸

포기라고 부르시겠습니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사랑한 방식이라고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살면서 한 번쯤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고 생각한 사람이

정말 있었습니까.


그런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나요,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오래 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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