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조작가 정민에 관하여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가 끝난 후에도 계속 머리에 걸려있는 한 가지가 있다. 종영 이후 좋은 글들이 쏟아졌고 납득할 만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결에서 얘기해야 할 것이 남아있음을 느낀다. 그 아리송한 느낌을 고심하고 글로 옮기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모두가 훈훈한 결말을 맞은 <모자무싸>의 마지막에 배제된 인물이 있다. 그건 다름 아닌 박경세(오정세)의 보조작가 정민(정민아)이다. 그녀의 존재는 등장부터 수상하다. 그녀는 이제 "늙고 고루한" 경세가 "초반만 반짝하고 뒤는 감당이 안돼서" "이번에도 망하면 다음은 없기 때문에" 투입됐다. 말 그대로 보조작가의 역할
하지만 정민은 "첫 줄에 오타"를 내고 "눈 뜨고 볼 수 없는" 글을 쓴다. 실력이 부족하다. 경세는 면접에서 "왜 작가님과 같이 해야 하냐"며 아무런 공도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이 장면은 장난스럽게 그려진다. 경세는 '잘한다 잘한다 해줘야 하는 아이'이므로 이건 치기 어린 행동이다. 현실에서 면접관의 어리광은 갑질과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정도는 일단 넘어가자.
정민은 경세를 보며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드린다. 이를 두고 정민의 성격이 그렇다는 상상을 할 수도 있지만, 이건 <모자무싸>의 기본적인 경향과 일치한다. 변은아(고윤정)가 두려움을 느끼는 황동만(구교환)을 품듯이 이 세계에서 젊은 여성들은 불안정한 연상의 남성에게 관대하다.
은아는 실력과 따스함을 동시에 갖췄기 때문에, 동만에게 조력과 응원을 모두 줄 수 있다. 그에 비해 고혜진(강말금)은 실력 몰빵이므로 경세는 보조작가로부터 따스함을 수혈받는다. 즉, 정민은 이 세계의 규칙에 맞춰 경세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 그 자리에 소환됐다.
정민이 경세를 향해 "여태 봤던 감독님들 중 최고!"를 외칠 때 연출이 인상적이다. 경세의 멍한 얼굴 뒤로 폭죽이 터지는 로맨스 연출. 한 마디로 경세는 그녀에게 반했다. 그는 환상을 방해하는 고혜진에게 짜증을 내기도 한다.
"실력은 없지만 도움은 된다"며 정민을 선택한 경세. 정민에게는 시작부터 치어리딩의 임무가 주어진다. 보조작가가 치어리딩이나 하는 게 맞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관계를 만든 건 박경세고, 그 관계에 대한 바카라임도 그에게 있다.
묘한 장면이 나온다. 고혜진과 정민 둘이 있는 장면에서 "사랑스러운 박경세 감독님"이라는 말에 혜진은 "너 가질래?"라고 묻는다. 이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어찌 되었건 정민이 흠칫하는 걸 보니 속 시원하다는 의견도 많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이 이상하다. "사랑스러운 감독님"은 분명 보조작가로서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멘트가 나온 근본적인 이유는 그녀가 적절치 않은 역할에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경세를 치어리딩 하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라면 와이프 앞에서도 그러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사랑스럽다"는 표현은 과하지만 수위 조절은 사소한 문제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건 보조작가를 대하는 경세의 태도다.
그런 정민에게 "너 가질래?"라고 되묻는 것은 이 관계의 문제를 사적인 차원으로 돌리는 것이다. 회사에서 매일 커피 심부름하는 사람이 "저는 커피를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건 눈치 없는 행동이다. 그렇다고 "그럼 카페로 이직할래?"라고 묻는 건 이상하지 않나.
○ 정민의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
하지만 이 장면이 문제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정민이라는 '캐릭터'와 관련이 있다. 일단 그녀의 서사는 작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보이지 않는다. 단편적인 정보만 주어질 뿐이다. 그런 캐릭터는 쉽게 도구화된다.
반면, 정민이 정세와 웃고 떠드는 걸 씁쓸하게 바라보는 혜진의 얼굴은 자주 클로즈업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혜진에게 공감하며, 정민을 마음에서 조금씩 밀어낸다.
마지막으로 정민은 자기가 "묻어가길 좋아한다"고 떠들어 댄다. 그녀가 자기 개성을 드러내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이 순간 '유부남의 사랑을 받으며 직업적으로 묻어가기 좋아하는 여자'라는 낙인이 그녀의 이마 위로 찍힌다. 그런 모습이 경세를 성공시키기 위해 고생해 온 혜진과 대비되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이입할 여지를 잃는다.
한 마디로 정민의 얄미운 모습은 그녀가 당하는 대우가 이상하다는 점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정민의 개념이 어떻게 박혀있든지 간에, 보조작가로서 온 사람을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일을 하러 온 사람과는 일을 해야 한다는 당연한 상식 말이다.
이 장면을 보고 당장 글을 쓰지 않은 이유는 결말에 어떤 반전이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경세가 마지막에 정민에게 많은 공을 돌리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모자무싸>는 정민에게 차갑다. 정민은 이 세계에서 사라진다. 그저 이해한다는 말을 남기고 미소지으며. 그렇게 그녀의 시간은 경세의 정서적 성장을 위해 소비된다. 제목에서 얘기하듯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워 성장할 동안, 정민은 뭘 한 걸까. 그녀의 소중한 한 때는 이렇게 소비되어도 괜찮은 걸까.
<모자무싸>는 혜진의 입을 빌어 경세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을 화두로 삼는다. 하지만 정민의 서사에게 정말 문제는 그게 아니다. 보조작가를 치어리더로서 소환해 창작의 동력으로 삼고, 부부 사이에 문제가 되자 내보내는 선택이야말로 이상하다. 마지막에 경세가 말한 "미안해"는 어떤 행동에 대한 사과일까.
○ 그녀들이 박해영의 애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
다른 인물에 비할 때, 박해영은 확실히 정민에게 별 애정을 주지 않는다. 이런 편애의 이유는 '한승아(문지원)'를 보면 알 수 있다. 장미란(한선화)과 싸우는 연예계 후배 말이다. 두 여자는 비등하게 싸우지만, <모자무싸>는 심정적으로 장미란의 편을 든다. 둘 다 잘못했지만 미란은 너무 솔직하고 뜨거워서 문제인 반면, 승아는 저열하다.
이 세계가 승아에게 차가운 이유는 그녀 역시 "묻어가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오정희는 그녀에게 "내 친딸? 너 따위와 비교도 안 되게 근사해"라며 아무에게도 빌붙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승아가 근사하지 못한 이유는 자기 남자친구에게 빌붙기 때문이다.
정민과 승아. 이들이 이 세계에서 일종의 악역을 맡아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이렇게 '묻어가는 여자'는 '구원하는 여자'의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박해영은 마치 엄마처럼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남자를 껴안고 품어서 끝내 길러내는 애정을 이상화하는데,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 묻어가는 여자들이다. 이들은 여신이 구원한 남자의 등에 냉큼 올라타서 체리피킹한다는 점에서, 찌질남을 버린 오정희보다 더 죄가 무겁다.
드라마의 성격상 대단한 벌을 내리지는 않지만, 끝내 축복받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점에서 이들은 이 세계에서 내쳐진다. 악인으로서 사라지는 형벌이다.
여기에서 다시 확인되는 것은 박해영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구도이며, 그것은 일전에도 말한 '젊은 여신의 구원'이다. 여성은 여신으로서 구원을 행하고, 남성은 신도로서 추앙하는 것이 이 세계의 규율이다. 그 율법을 온전히 수행할 때 그들의 사랑은 축복받는다.
○ 추앙할 줄 모르는 변절자, 마재영
이러한 차원에서 주목할 다른 인물은 마재영(김종훈)이다. 변은아의 전 남자친구. 그는 은아의 헌신을 인정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물론 여러 방면에서 못됐지만, 그의 가장 두드러진 죄목은 '여신의 구원에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은총을 받고도 추앙하기를 거부하는 괘씸한 신도이며 변절자다.
그러니까 남성을 구원하긴커녕 묻어가려는 정민과 승아, 구원받고도 은혜도 모르는 재영은 이 세계의 가장 큰 적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박해영이 추구하는 구도(젊은 여신의 구원 - 버려진 남성의 경배)를 타격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 세계에서 어떤 연민도 받지 못한 채로 추방당하는 이유다.
○ 한쪽으로 치우치면 사각지대가 생긴다
지난번에 <모자무싸>에 구원 판타지가 있다는 글, 박해영의 여성관에 편향성이 있다는 글을 썼을 때 가장 많이 받은 오해는 이것이다. 내가 젊은 여성-찌질 남성의 사랑을 싫어한다는 것. 혹은 그런 사랑을 폄하한다는 것.
오해를 막기 위해 다시 밝히자면 이 글은 특정한 가치관이나 사랑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든 내가 감히 입을 댈 이유도 없고 당연히 나는 모든 형태의 사랑을 존중한다.
이렇게 이해하면 쉽다. 현실에서 가난한 여성과 부유한 남성의 만남은 흔하고,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 한다. 하지만 김은숙의 작품에서 이런 구도가 자꾸 반복될 때 우리는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있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박해영의 작품 역시 특정한 구도(줄여서 '구원 서사'라고 하겠음)에 치우쳐 있으며, 더 나아가 거기 어긋나는 형태의 인물이나 사랑을 배격하는 방식으로 구원 서사를 다시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데렐라 스토리를 쓰면서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는 여자를 악인으로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에는 어떤 폐쇄성이 감지된다.
하나의 구도에 경도되면 다른 구조를 보지 못한다. <모자무싸>에서 인물들은 구원 서사를 기준으로 평가받으며, 그 구도에 맞으면 애정을 받고 맞지 않으면 악인으로서 소비된다.
그러다 보니 정민 같은 케이스가 생긴다. 그녀가 보조작가로서 받은 대우가 합당한가, 이 이상한 관계의 문제는 누구인가. 그녀가 일한 시간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주어야 하나. 이런 고민은 개입될 여지가 없다.
오로지 그녀가 '묻어가는 여자'라는 것만이 중요하며, 그러므로 적당히 소비되고 사라져도 괜찮은 것이다. 이런 태도는 박해영이 은아나 동만의 고충에 세심하게 공감하고 위안을 건네려 했던 것과 상반된다.
○ 작가의 편향성이 문제인 이유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별다른 게 없다. 특정한 방향으로 바뀌라고 종용하는 것이 아니며, 당연히도 박해영이 지금처럼 쭉 작품 활동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나는 말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보지 못했던 어떤 부분을 새로 볼 수 있기를 원한다. 정민의 이야기가 다른 시각에서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말하기를 원한다.
작가가 특정한 방향으로만 달리는 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시야가 가로막혀 있는 것은 문제다. 사각지대에서는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야를 고루 확보한 뒤 어떤 방향을 향하든 그건 작가의 마음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런 부분이다.
박해영은 지금 우리 시대에 무척 중요한 작가다. 드라마 한 편에 대해 뭐 이리 깐깐하게 분석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이건 우리가 공유한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며, 평자로서 한 편의 작품을 이렇게 오랜 시간 고민하는 것은 결국 애정이다.
그러니 내가 바라는 건 박해영이 이 글을 보고 자기 세계를 뜯어고치는 것도, <모자무싸>를 잘 본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끼는 것도, 구원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욕감을 느끼는 것도, 어떤 사람들이 자기 사랑에 대해 공격받았다고 느끼는 것도 아니다. 한 방향으로 기울어진 <모자무싸>를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때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