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줄여 주는 시간은 모두에게 같은 기회가 되지 않는다
2021년에 'AI는 프로그래머를 대체할 수 있을까?'라는 글을 썼다. 그 글의 마지막에 “개발자들은 한동안은 안전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적었다. 코드를 작성하는 행위는 AI가 대신하더라도, 무엇을 만들 것인지 정하는 일은 사람의 몫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구분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동안'이라는 말에 예전만큼 안심이 되지는 않는다. 소프트웨어 개발의 세계는 AI 때문에 이미 천지개벽했다. 요구사항을 정리하고 코드를 만들고, 테스트 결과를 보고 다시 고치는 작업까지 AI에 맡길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다. 사람이 다음 일을 정하는 동안에도 중간의 작업은 계속 진행된다.
이 변화를 보면서 나는 이미 무언가를 만들어 굴리고 있던 사람들이 더 유리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의 1을 만드는 일을 '제로 투 원'이라고 한다면, 이미 1을 이룬 사람들이 100으로 가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서비스를 운영하는 일의 일부다.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정해야 하고, 만든 것을 실제로 내보내야 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다시 고쳐야 한다. 그 사이에서 겪는 시행착오까지 코드가 대신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AI의 도움으로 온라인 상점을 만들었다고 해 보자. 상품 소개와 광고 이미지까지 금세 만들 수 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 상품을 원하는지, 어디에서 고객을 데려와야 하는지, 얼마에 팔아야 남는지까지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주문이 들어온 뒤의 배송과 반품도 남아 있다. 상점 하나를 만드는 것과 장사 하나를 성립시키는 것은 다르다.
이미 물건을 팔고 있는 사람은 사정이 다르다. 고객이 반복해서 묻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작업에 시간이 많이 드는지, 무엇을 고치면 판매 결과가 달라지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 사람에게 AI는 바로 써 볼 자리가 있다. 반복 문의를 처리하고 상품 설명을 고치는 시간을 줄인 뒤, 그만큼 다음 상품이나 판매 방법을 시험해 볼 수 있다.
나는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돌아가는 일의 흐름을 가진 사람이 더 크게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드는 속도만 빨라져서는 부족하다. 고객에게 전달하고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까지 연결되어 있어야 아낀 시간을 다음 성과에 쓸 수 있다. 모든 일을 자동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의 판단이 필요한 곳은 남겨 두면서, 그 사이에서 반복되던 일을 줄여 나가는 것이다.
개발 바깥에서도 이런 사례가 보인다. 법률회사 A&O Shearman은 법률 AI 기업 Harvey, Microsoft와 함께 계약 업무 도구를 개발했고, 2025년 4월에는 대출 계약 검토 에이전트의 제작 사례와 여러 법률 업무에 대한 도입 계획을 공개했다. 이미 고객과 전문 지식을 가진 회사가 자기 업무 안에 AI를 넣고 있다. 도구를 만드는 사람뿐 아니라 어디에 써야 하는지 아는 사람에게도 기회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AI 덕분에 처음 자기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기존 사업자가 오래된 방식을 버리지 못해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시작하는 비용이 낮아졌다고 해서 격차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첫 고객을 찾고 있는 사람과 이미 고객의 반응을 보면서 다음 실험을 하는 사람은 같은 도구를 손에 쥐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다르다.
이 가속이 일자리에 미칠 영향은 반갑게만 볼 수 없다. 같은 일을 더 적은 사람으로 할 수 있다면 사업의 비용은 줄어든다. 그 일을 나누어 맡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내 일이 남아 있더라도 내 자리가 필요한지는 별개의 문제가 된다. 생산성이 높아져 새로운 수요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일자리를 걱정하는 사람이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이런 압력이 AI를 실제 업무에 연결한 작은 조직에서 더 빠르게 인력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가 직접 일을 나누고 비용을 결정하는 조직에서는 도구를 바꾸는 판단이 다음 채용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한 명이 퇴사했는데 후임을 뽑지 않거나, 외주를 줄이거나, 계획했던 채용 공고를 내지 않는 식이다. 비용 압박이 커지면 기존 인원을 줄이는 결정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고용 불안은 해고를 당하는 순간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옮겨 갈 다음 자리가 줄어드는 것도 불안한 일이다.
작은 회사가 AI 도입 자체에서 앞서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OECD의 2025년 기업 이용 자료에서는 큰 기업의 AI 이용 비율이 작은 기업보다 높았다. 도구를 들여오는 일과, 그 도구에 맞춰 업무와 인원을 바꾸는 일은 다른 문제다.
큰 조직에서는 효율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 많다. AI가 결과를 잘 만드는 것과 그 결과를 조직의 이름으로 내보내는 것은 다르다. 누가 확인했고, 누가 승인했으며, 문제가 생기면 누가 설명하고 수습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기존에는 사람이 맡고 있던 작업을 AI에 넘기더라도 그 사람의 바카라임까지 함께 넘길 수는 없다.
가령 AI가 계약서 검토 의견을 만들었다고 해 보자. 검토 시간이 줄고 문장도 그럴듯하다. 그래도 중요한 조항을 빠뜨렸을 때 고객에게 설명하고 손해를 수습할 주체는 필요하다. 검토와 승인을 여러 부서가 나누어 맡고 있다면 각자의 바카라임 범위를 다시 정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큰 조직에서는 한동안 AI가 만든 결과의 품질만큼이나, 그 결과에 이름을 걸 사람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바카라임을 지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지금의 인원을 지켜 주는 것은 아니다. 결과를 만드는 데 열 사람이 필요했던 일도 AI를 쓰고 한 사람이 확인하는 구조로 바뀔 수 있다. 실제로 한 사람이 어디까지 검토할 수 있을지는 업무마다 다르겠지만, 바카라임이 남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일을 하던 자리도 그대로 남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큰 조직은 이 구조를 바꾸는 데 시간이 더 걸릴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다음의 큰 변화가 일을 시작하는 지점에서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AI에게 일을 맡기려면 먼저 내가 무언가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매출을 들여다보고 이상을 느끼거나, 고객의 불만을 읽고 고칠 부분을 찾거나, 새로운 기회를 발견해야 한다. 실행을 많이 맡겨도 내가 살펴보고 일을 꺼내지 않으면 다음 작업은 시작되지 않는다.
외부 정보를 읽고 도구를 사용해 행동하는 AI는 이미 존재한다. 변화 감지와 실행을 연결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령 특정 상품의 반품 사유가 달라진 것을 감지하고, 최근 문의와 상품 설명을 비교해 잘못된 설명을 찾아 수정안을 준비하는 식이다.
내가 다음 큰 변화라고 보는 것은 이 기능의 등장이 아니라, 실제 사업에서 믿고 맡길 만큼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때다. 어떤 변화를 중요한 신호로 볼지 고르고 필요한 일을 시작하는 데 사람이 일일이 붙어 있지 않아도 된다면, 일을 하는 속도뿐 아니라 일이 시작되는 빈도도 달라질 것이다. 사람은 중요한 판단과 결과의 바카라임을 맡으면서도 훨씬 많은 일을 진행할 수 있다.
그때도 이미 일의 흐름을 가진 사람이 유리할 것 같다. 살펴볼 고객과 데이터가 있고, 발견한 문제를 고칠 통로가 있으며, 결과가 좋았는지 확인할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AI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이미 연결해 둔 것들의 가치도 커질 것이다.
개발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는 것은 분명 즐겁다. 하지만 그동안 여러 사람이 나누어하던 일을 적은 사람이 해내게 된다는 사실 앞에서는 선뜻 낙관하기 어렵다. 2021년의 글에도 AI의 한계가 언제든 확장될 수 있으니 절대라는 것은 없다고 적었다. 지금은 그 단서가 글의 나머지 부분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AI 덕분에 시작하는 일은 쉬워졌다. 나는 그보다 이미 시작해서 끝까지 가 본 사람의 다음 시도가 얼마나 빨라질지를 더 눈여겨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