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6
모든 변화는 상실이고
상실은 애도를 동반한다
기억의 습작을 파헤치면 언제나 그해의 계절이 있다
빛을 향해 자라나던 어린 가지를 보듬으며 나는 내가 누군가의 온전한 그늘이 될 수 있다 믿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웅크린 나의 그림자가 당신의 맑은 대지를 잠식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함께 써 내려간 문장들이 1년, 2년, 3년 수년 의 강을 이룰 때
나는 물결 아래 무거운 납덩이를 숨겨두었다
나의 안식이 당신의 희생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성이었음을
뒤늦게 무너지는 벽돌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진실 앞에 나는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비겁한 사람이었는지 배운다
우리가 물리적 거리를 좁혀 서로를 마주했을 때 나의 사랑은 구원이 아니라 고통의 거울이었으며 나의 다정은 진실을 가로막는 가장 잔인한 장막이었다
당신이 내게서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믿었던 당신의 긴 시간이었음을 알기에 나는 나의 죄를 사랑이라 부르는 일조차 스스로 금한다
이제 소식 없는 창 너머로 차가운 정적만이 고여있으나 나의 침묵은 당신을 향한 가장 처절한 항복이다
나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만 비로소 당신의 평화가 다시 싹틀 수 있음을 알기에 나는 멈춰버린 시계 바늘 뒤로 나의 이름을 지운다
사랑했다, 당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비겁함까지도
끝내 당신에게 닿지 않을 이 마지막 마침표가 부디 당신의 상처를 덮는 하얀 눈이 되기를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 줄 알던 당신에게
계절을 담아 오랜 엽서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