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는 것이 아닌 묵히는 시간을 지나오며

강박과 비교 대신 나를 택하다

by클로드

장맛은 묵히는 맛이라고 합니다.

참는 것과는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뜻


우리의 삶도 된장처럼

천천히 익혀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된장국 中에서-

<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 / 주영헌 시집




이 시를 읽다가 참는 것과 묵히는 것의 차이 앞에 멈춰 서버렸다. 지금 나는 묵히는 시간에 들어가 있는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복직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에세이를 출간했다. 온라인으로 열심히 출간 홍보를 하고 브랜딩이며 여러 이벤트도 기획해 보았다. 계속 쓰는 사람이고 싶어서 글도 멈추지 않고 써나갔다.


그날도 퇴근 후 바카라상 앞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 편의 글을 다 써내고 찌뿌둥한 몸을 요가 매트 위에 앉혔다. 스트레칭을 하다가 다리를 앞으로 쭉 뻗어보았는데, 응? 내 다리가 이상하다. 정강이 옆이 찌그러진 듯 움푹 들어가 있었다. 몹시 놀랐다. 뼈가 잘못되었나 조심스레 만져보았지만 별다른 통증은 없었다. 그날 새벽 자다가도 여러 차례 깨어 다리를 확인해 보았지만 함몰 부위는 매우 매우 더딘 속도로 복구되고 있었다.


이후 나의 병원 순례가 시작되었다. 원인을 찾아 종합병원 안에서 여러 진료과를 전전했다. 진료를 받고, 검사를 예약하고, 다른 날 검사를 받고, 또 다른 날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고, 그러다 다시 다른 과로 전환되었다. 그러는 사이 어깨와 팔도 고장이 났다.


멈춤이 필요했다. 회사를 그만둘 순 없으니 집에서 하던 모든 작업을 멈췄다. 글도 멈추고, 브랜딩도 멈췄다. 출간 홍보 활동도 물론.


처음에는 덜컥 겁이 났다. 한편으로는 퇴근 후 바쁘게 이어가던 작업을 다 물리고 가족과의 시간, 휴식에만 집중하니 편하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모처럼 진짜 여유를 찾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나중에는 속상함이 찾아왔다. 좋아하는 일들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 서글펐다.


우울한 마음에 매몰되어 있던 때, '멈춤'에 대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김미경 강사님은 그러셨다.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라고. 원래 삶이란 여러 변수가 존재해서 힘든 거라고. 멈춘 동안 그 변수들이 서로 만나 풀리기도 한다고. 그러니 그것들이 일하도록 기다려주자고 말이다. 그 시간을 지나오며 다시 예전으로 똑같이 돌아가는 것이 아닌, 또 다른 내가 되자고. 고난을 통해 배운 내가 되자고 하셨다.


이 영상이 나를 수렁에서 힘껏 건져내주었다. 그리고 마침 병원에서 다리에 대한 진단을 들었고, 처방약과 생활 습관, 운동으로 관리하며 사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고장 난 팔은 큰 검사를 앞두고 기다리는 한 달 사이 다 나아버렸다. 정말 '시간' 속에서 저절로 풀리는 것들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 후 나는 일 할 때나 작업할 때 같은 자세로 한 시간 이상 앉아있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오랜 습관이던 나쁜 자세도 바로 잡고 있다. 수시로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스트레칭을 해주고, 어깨 긴장도 툭툭 풀어준다. 저녁 식사 후에는 아이와 함께 밤산바카라을 나가 가벼운 달리기도 조금 한다.


글을 쓰고 SNS 브랜딩을 하는 일에도 힘을 한결 빼고 있다. 어떤 강박에 갇히지 않아도 된다고, 어차피 그렇게 해서는 지속할 수도 없다고 다독이며 말이다. 내가 아파서 멈춘 동안에도 열정을 다해 활동하던 사람들을 보며 조급해하던 마음도 스르륵 벗어 버렸다. 그렇다. 강박과 비교를 내려놓고 보다 나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 한결 나아진 몸과 마음으로 다시 컴퓨터 앞에 작가로서 앉았다. 그동안 멈춘 시간을 처음에는 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지만 몸 생각해서 참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오며 알게 되었다. 주영헌 시인님의 시 속 된장처럼 나의 시간도 마냥 참는 것이 아닌 묵히는 시간이었다. 스스로를 살피고 돌보며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 보는 시간.


그러니 다시 활동을 시작해 보려는 지금, 나는 참았던 것을 폭죽처럼 팡 터뜨리는 게 아니다. 묵혀온 것을 천천히 풀어낼 것이다. 빡빡하고 조급했던 마음에 숨구멍이 드나들어 조금은 말랑해졌기를 바라며, 그 숨구멍이 다시 막히지 않도록 천천히 호흡하며 걸어갈 것이다.


은근히 풀어지는 장맛도 제법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