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이라는 필연 속에서 건진 오롯한 자유의 루틴
빗각(BitGak) 04
커피
밤이 물러가고 하늘이 검푸러워지는 시간, 서재에 앉아 불을 밝힌다.
습관이라고 하면 너무 가볍고, 의식이라고 하면 너무 무겁다.
그냥 어느 날부터인가 내 몸과 시간이 맺은 약속이 된 것이다. 수십 년을 그렇게 했으니까.
물을 데운다. 그 사이 원두를 분쇄한다.
드르르르 소리가 고요한 새벽을 깨운다.
그리고 은은한 향이 서재를 채운다.
어릴 적엔 출근 전 아버지의 냄새였던 그 향이, 언제부터인지 내 서재를 채우고 있다.
그리고
커피를 내린다.
뜨거운 물이 천천히 어둡고도 향긋한 커피로 내려온다.
처음엔 맑고 밝던 액체가 점점 진해진다.
어두워진다.
그런데 왜 이 향긋한 과정을 통해 내려온 커피를 마시면 마음이 차분해질까.
일종의 화학작용이란다.
하지만 그걸 알게 된 후로도 그 느낌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 잔을 손에 쥔다.
언젠가 읽은 글이 자꾸 떠올랐다.
우리가 흔히 '깨어난다'라고 믿는 현상은 사실 이 검은 액체 속 카페인 분자가 일으키는 화학작용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였다.
내 뇌 속 아데노신 수용체에 카페인이 달라붙어 밤새 쌓인 졸음 신호를 차단하고,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를 촉진해 내가 '깨어났다'라고 느끼게 만든다는 것.
조금 복잡한 화학적 설명이다.
아주 쉽게 말해 내가 그저 '카페인 중독'이 아니냐는 짓궂은 진실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건 나의 선택이 아니다.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일어나는 분자 수준의 필연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필연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나는 커피를 마신다.
그러면서 깨어난다.
이 과정은 단순하면서 과학적이다.
증명도 가능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매일 새벽에 커피를 마시니 쉽게 깨어나지."
하지만 내가 깨어나는 것은 정말로 카페인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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